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대한 단상 – 다양성은 보수의 아킬레스건이자, 진보에게는 기회

 

오랜만에 포스팅…
요즘 일이 바빠서 못올리다가 지금 현재 미국 보스톤에 2주간 출장을 와 있어서, 밤에 시차적응을 못하는 바람에 (?) 글을 쓴다.

1. 역사교과서 문제는 결국 보수진영의 자폭으로 끝날 것 같다.

대중에게 공개되는 발언대와 토론에 나오는 사람들의 계속된 헛발질도 그렇고.. 원래 보수진영에서 주로 사용하는 전략은 우리나라가 아닌 밖에 있는 공적을 만들어서 ‘저놈들 때문에 우리가 큰일났다’ 라고 하는 방향으로 사용해서 내부적으로 국민들이 보수진영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작용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완전 잘못된 전략, 잘못된 전술의 연속이다.

내부적으로 분란을 만들어서 일단 ‘Go’ 버튼을 눌러놨는데, 여론이 점점 악화되기만한다. 하지만 대통령이 지지하고, 이미 너무 빨리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해버린 판국이라서 돌이키기 어려워 보인다. 돌이키고 싶은 사람들도 눈치를 보면서 말을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전략과 전술이라는 것은 얼마나 유연한가? 라는 부분이 중요한데, 지금의 국정교과서 논란은 전혀 유연성이 없다. 만약 관철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더 크게 역효과가 날 것이다.

“저 고지를 점령하라!” 라고 대장이 명령을 내렸으니 돌격 앞으로를 했는데, 막상 지형과 지물이 생각과 달랐다. 그런데 전략과 전술을 바꿀 수가 없다. 그러므로 꽝이다.

2.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런데…

솔직히 국사 교과서에 묘사되는 내용들이 ‘미묘하게’ 어떻게 북한을 찬양하는지, 인민 민주주의를 옹호하는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다만 그 과정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뿐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평소에 민생에 관심도 없던 정치가들이 갑자기 역사인식이 투철했던 애국자로 둔갑해서 무언가를 밀어붙이려고 하는 모습은 별로 정치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도 좋아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되어서 고쳐야 한다고 외치는 보수진영의 (논리가 아닌) 태도는 폭력으로 비춰지고 있다. 그걸 빨리 깨달아야 한다.

3. 진보의 화두는 “다양성”

아마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의 화두는 ‘다양성’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양성’이라는 화두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작은 비중을 차지해 왔다. 많은 이민의 역사가 있지도 않고, 민족적, 인종적으로 다양성이 충분히 발달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균일한 사람들이 경제개발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달려서 ‘효율성’이라는 것이 ‘다양성’을 이겨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양상이 완전 달라질 것이다. 위에 언급했듯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보수진영의 자폭으로 끝날 것이 분명한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진보진영에서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 라는 점은 우리나라 진보진영에 제대로된 인식과 사고가 존재하는지를 증명해주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다양성이라는 화두를 제대로 이용하고 넘어가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진보진영의 미래는 앞으로 없을 것 같다. 이민이 늘고 있고, 다민족 사회로 발전하고 있다. 언젠가는 북한에서 들어오는 탈북자나 난민이 대규모로 생길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균질한 사람들의 사회만을 바라며, 다른 사람들의 뇌속에 내가 원하는 사상을 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보수진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번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내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좌파라고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너무 오른쪽에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거나, 세상에는 좌/우 뿐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즉, 다양성에 대한 인식은 지금 보수진영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국정 교과서 문제로 확인한 것 같다. 이걸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다면 진보는 스스로의 무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 것이고, 만약 제대로 이용한다면 보수는 스스로의 약점을 드러낸 것에 대해서 오랜기간 후회할 것이다.

의사에게 살해 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과 루이 14세의 치아

예전에 어떤 책에서 루이 14세의 주치의는 치아가 만병의 근원이라서 루이 14세에게 모든 치아를 다 뺄 것을 권했고, 실제로 루이 14세는 이 조언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루이 14세는 모든 치아를 다 뽑고 평생 소화기관에 무리를 겪었고, 발치 과정에서 입안에 상처도 많이 생겨서 입에 음식물도 많이 끼어서 고생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의 의술로는 치아가 썪으면 다양한 다른 합병증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며, 이를 치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가 썪어서 고생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당시의 의사들은 악의 근원을 제거한다는 차원에서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의학 지식을 자랑하던 소르본 대학의 의사들은 이런 믿음을 마치 진리처럼 믿고 따랐고 나라의 가장 소중한 존재이자 절대 군주인 루이 14세의 치아를 몽창 뽑아버리는 충성심을 보였다.

지금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당시에는 의학 수준이 낙후되어서 바보같은 짓을 했던 것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백년 후에 지금의 의술을 돌아보면 도대체 미래의 우리 후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몇백년 전 최고의 대학에서 국왕에게 조언을 하던 의사의 수준이 지금 보면 우스울 지경인데, 오늘날 일반인에게 행해지는 많은 의료행위 중에서는 그릇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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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오 대학의 의사인 곤도 마코토가 쓴 책 ‘의사에게 살해 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 이라는 책은 일본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기존의 의학계에서 갖고 있는 믿음에 대한 도전(challenge)를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기적 유전자’ 이후로 가장 나에게 큰 지적인 충격을 준 책이다. 평소에 ‘그럴 것 같다’ 라고 믿고 지내던 나의 많은 믿음을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권위자의 경험으로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책을 다시 펼쳐보지 않고 기억나는 이 책의 메시지들은 다음과 같다.

  • 암에 걸리면 굳이 치료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어차피 죽는다. 오히려 치료를 안하고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도 적고, 고생도 덜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 감기에 걸리면 병원에 가지 마라. 어차피 인간에게는 자기 치유능력이 있어서 감기는 낫게 되어 있다. 오히려 해열제, 항생제 등을 먹으면 해가 될 뿐이다.
  • 너무 진료를 많이, 자주 받을 필요는 없다. 쓸데없이 자가치유가 될 과정에 있는 병들을 찾아내서 치료를 할 필요는 없다.
  • 그 외에도 비타민 먹을 필요 없다. 너무 살을 뺄 필요 없다. 예방주사 맞을 필요 없다.
  • 의사도 돈을 벌어야 하는 생활인이다. 의사들도 이것저것 많은 구실을 만들어서 치료비나 검사비를 올려야 할 인센티브가 있다. (아마도 그 뒤에 있는 제약회사가 더 큰 인센티브가 있을 것)

이런 내용들이 나에게 아주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평소에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한 점들에 대해서 그가 오랜 생활을 하면서 경험적으로 느끼고, 과학적인 자료를 보면서 검증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줬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에서의 유방암에 대한 기준이나 콜레스테롤에 대한 기준, 그리고 혈압에 대한 기준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계속 달라지는 것 또한 참으로 충격적이다. 그 과정에서 쓸데없이 항암치료로 남은 인생을 고통속에서 보낸 사람들, 쓸데없이 유방을 제거한 많은 사람들, 쓸데없이 위의 많은 부분을 적출해서 마음껏 맛있는 음식도 먹지 못하고 남은 생을 살다가 사람들, 쓸데없이 콜레스테롤/ 혈압 관련 약을 먹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내가 볼 때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럼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 곤도 마코토씨는 ‘가만히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죽음이 다가오면 더 진중하고, 겸손해지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죽음을 맞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의학이 발달할 수록 집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는 자연사가 줄어들고 계속 병원에서 이것 저것 해보다가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은 생각하게 하는 바가 많다.

나 또한 지금의 의학이 완벽하지 않다고 믿을 뿐 아니라, 어쩌면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중일지도 모른다고 믿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이 포스팅을 빌어서 한가지 비밀을 말하자면, 나는 거의 6개월 이상 샴푸를 사용하지 않고, 비누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전혀 생활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아주 편하고 건강하다고 느끼고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가장 먼저 사람들이 냄새 나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실제로 따뜻한 물로 깨끗하게 머리를 씻고 세수를 하면 아주 깨끗하고 상쾌하다. 만약 머리에 너무 먼지가 많이 붙을 곳에 다녀온 때에는 그냥 샴푸를 쓰기도 한다. 채식주의처럼 흑백의 논리로 노푸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필요하면 샴푸를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꼭 필요하지 않으면 샴푸나 비누를 쓰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인류는 수천년간 샴푸를 사용하지 않고 살아왔으며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부터 우리 주변에 샴푸가 없으면 못 살 물건이 되었는지 스스로 의심해 보면서 이런 생활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미생물의 세계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비누나 샴푸를 너무 쓰는 것이 좋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살고 있다.

주변을 보면서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많은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이 책에서 권하는 생활방식과 마음가짐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을 읽다.

 

계속되는 시차 부적응 때문에 독서량만 쭉쭉 늘고 있다. 오랜만에 한글로 쓰여진 책들을 읽으니 마치 목말랐던 사람이 물을 마시듯이 진도가 빨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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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고수의 생각’이라는 책을 서점에서 봤을 때 바로 집어들어서 구매했다. 바둑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나이지만, 그래도 조훈현이라는 사람이 한 때 바둑세계를 주름 잡았던 고수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 계보가 이창훈, 이세돌 이라는 프로기사로 내려온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훈현 프로가 불과 30대 후반의 나이에 제자인 이창훈 프로에게 왕좌를 내준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어린 시절에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섬겼던 스승인 세고에 선생이 조훈현이 떠나고 난 후에 자살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책에서 소개되는 많은 바둑세계의 일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글을 읽으면서 바둑이란 것이 참 인생을 보여주기도 하고, 두는 사람의 성격도 잘 드러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둑의 세계에 빠지게 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깊이 생각하게 되는 몰입(Flow)의 경지에 들게 된다는 점도 아주 흥미로웠다. 예컨대 이 책에서 소개되는 대목 중에서

집중, 집중…… 나는 고요한 생각의 결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천천히….. 거칠었던 호흡이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녜웨이핑도 보이지 않고 진행요원들도 사라졌다. 조바심도 초조함도, 심지어 이기고자 하는 욕망까지도 사라졌다. 바둑과 나, 단 둘만 남았다. 절대적인 고요의 순간,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래, 바로 여기구나!

p 21에서 발췌

위의 부분은 녜웨이핑과의 대국에서 초집중을 하는 순간을 담은 글인데, 물론 당시의 생각을 글로 100% 옮겼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몰입(flow)의 경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자신의 제자인 이창호에게 패배하고 돌아오는 길의 심정을 담은 부분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데 유난히 마음이 평화로웠다. 모든 걸 잃어버렸는데 이상하리만치 홀가분했다. 며칠 동안 실컷 잠을 자며 휴식을 취했더니 몸도 기분도 더 좋아졌다. 꼭 새로운 뭔가를 시작할 때의 기분이었따. 그때부터 내 안에서 긍정적인 생각이 마구 쏟아졌다. 타이틀이 하나도 없다는 건 이제 잃을 것도 없다는 걸 의미했다. 지키려고 할 때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막상 다 잃어버리니 자유로웠다.

P 71에서 발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왕좌에서 내려온 챔피언.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제자에게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생각이 잘 담겨 있었다. 바둑기사는 승부사이다. 승패에 대해서 누구보다 민감하고,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리라.. 그런 사람이 한 때 모든 타이틀을 석권하다가, 또 그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이 책에서는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위에 소개된 두가지 사례는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인사이트가 담긴 글 중에서 일부일 뿐이다. 이 책은 정말 감동적인 한 사람의 드라마가 잘 담겨져 있었다.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던지 일독을 권한다. 가치가 있는 책이다.

야당의 무능에 동의하다 –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을 읽고

 

다니엘 튜더가 쓴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을 읽었다. 네덜란드에 있는 동안에 한국에서 회자되고 있다고 하여 읽고 싶었던 책이다. 다니엘의 전작이었던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또한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주저없이 구매해서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시차적응에 완전 실패하고 있어서 4일째 새벽 2시면 멀뚱멀뚱 깨어 있다. 책 읽는 것 이외에 할일이 딱히 없어 하루만에 책을 흡입하듯 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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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다니엘은 한국 사회를 보는 인사이트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동의하는 부분은 바로 ‘야당의 무능’ 부분이었다. 최근 4-5년간 우리나라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새정치연합의 아젠다 세팅 기능 상실 –> 새정치연합은 만년 야당으로 전락 –> 야당은 여당에 반대하는 역할에만 그침 –> 새누리당 내부에서 계파정치로 인하여 대안 제시 –> 새누리당의 선거 승리 –> 특히 젊은 층 대중의 정치 무관심과 피로감 증대 –> 새정치연합의 정책이 여당을 따라감 (혹은 여당에 반대한는 것 이외에 없음)

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 악순환의 꼬리는 과연 어디에서 시작되어서 어디에서 끝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가장 큰 요인 중에 하나는 야당의 아젠다 세팅 능력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내가 다니엘의 책을 읽으면서 동의했던 부분이다.

반면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당시에 MB 정부와의 선긋기를 하듯이, 새누리당 내부적으로 기존의 과오에 대해서 부정하기도 하면서 대안을 제시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같다. (일본의 계파정치에 대한 벤치마킹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흡사하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여당의 무능 및 부패와 부정에 대해서 새삼 놀라거나 분노하기 보다는 야당의 대안제시 능력이 전혀 없음에 대해서 더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다니엘의 책을 읽으면서 전적으로 동의했던 부분..

그 다음에 갑자기 다니엘은 여러가지 정책 아젠다를 내세우면서 책을 황급히 끝맺고 있다. 그 중에서는 책의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이 ‘칼퇴근 기업에 법인세 경감’과도 같은 논리적인 설명 없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 같은 내용들도 있어서 동의하기가 좀 어려웠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야당(새정치연합)이 아젠다 셋팅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다니엘은 책에서 그 보다는 ‘언젠가 한국에서 풀뿌리 민주주의 정당이 등장할 것이다’ 라는 정감록 같은 예언을 내세우고 있는데, 이는 실현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당장 Actionable 한 대안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너무 쉽게 야당에 대한 희망을 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새정치연합에서 희망을 찾기가 너무 어렵다 라는 말에 동의한다고 가정하자. (사실 나는 동의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풀뿌리 민주주의의 형성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대안제시를 해야 하는데, 이탈리아의 사례 언급 정도에서 그치고 있어서 좀 아쉬웠다. 하지만 외국인에게 이정도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고,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할 몫이다… 라고 한다면 수긍하겠다.

아무튼 이 책은 우리 세대가 한번쯤 꼭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책이다. 특히 2012-2015년을 거치면서 박근혜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신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이 트위터나 페북에서 박근혜 조롱하기에 시간을 쏟는 것 보다는 이 책을 좀 읽으면서 풀뿌리 민주주의 정당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 보는 것이 더 건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율을 유지해 주시는 분들은 트위터도 페이스북도 하지 않는다. 그런곳에 계속 박근혜 조롱하기를 해 봤자 큰 효과는 없다고 생각한다.

유럽에서 돌아오니 보이는 것들

 

짧은 암스테르담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도쿄, 시카고, 베이징과 대학교 때 했던 6개월 간의 배낭여행까지 포함하면 이번 나의 암스테르담 생활은 그래도 짧게는 몇 달, 그리고 길게는 몇 년을 떠나 있다가 한국에 돌아온 다섯번째 경험이다. 이렇게 오랜 동안 한국을 떠나 있다가 돌아오면 우리나라의 변화된 모습이나, 혹은 그 이전에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된다.

1. 서울의 교통

금요일 오후에 인천 공항에서 강변역 집까지 오는 길은 정말 길었다. 거리상으로는 약 70km정도로 차로 달리면 한시간 정도에 충분히 올 수 있는 시간이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두배 정도인 2시간이 걸렸다. 특히 유럽의 도시들은 그 크기가 작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멀리 떨어진 공항에서 이동할 일입 별로 없는데다가 내가 살던 암스테르담은 자동차보다는 자전거가 많아서 이런 교통체증은 오랜만이었다. 물론 암스테르담이나 로테르담 근처도 밀릴 때는 엄청 밀리지만 이렇게 두시간 내내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느낌은 분명 익숙한 광경이면서도 새롭게 다가왔다.

대한민국은 서울이라는 한 패에 모든 것을 건 도박을 하고 있다. 교육, 문화, 경제, 행정의 모든 기능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보니 과밀화 되어 버렸다. 서울이 실패하면 대한민국은 실패할 것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서울이라는 괴물같은 도시를 떠나고 싶어하면서도 저마다의 이유로 떠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것이다.

MERS 사태와 같이 심각한 전염병이 퍼지면 더 큰일이다. 전 인구의 1/4, 서울 인근의 위성도시까지 포함하면 1/3 가량이 한 지역에 모여살고 있는 현실이 때로는 심각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한 곳에 몰빵을 하면 결국 리스크 분산이 안 된다. 행정/의료/치안 등이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살면서 발생하는 돈으로는 계산조차 할 수 없는 비효율은 또 어떤가? 통근버스에 몸을 싣고 하루에 한시간, 두시간씩 허비하는 직장인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전세대란, 월세대란, 임대차 문제 등등, 서울이라는 괴물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나라에서 작은 가게를 자영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게 렌트비를 걱정하면서 사업을 할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미국이나 유럽처럼 혁신적이고 재미있는 리테일이 발달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높은 월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 중심에 서울의 과밀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럽을 여기저기 여행하면서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유명 도시들조차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을 처음 알고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대부분 인구가 과밀화 되어 있는 도시들은 아시아에 몰려 있거나,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수탈 창구로 사용되던 도시들. 유럽은 정책적으로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역사/문화적으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인지는 몰라도 도시들이 분산되어 있다. 빌딩이 높지 않아서 늘 하늘을 볼 수 있고, 차가 밀리는 구간이 길지 않고, 도시 끝에서 끝까지 약속 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경우가 많은 그런 곳들이 많았던 것 같다.

도시계획이나 인구분산 같은 큰 그림이야말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데, 과연 우리 정부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지…

2. 요리

시차 적응 중이라서 새벽 2시부터 일어나서 TV를 좀 봤다. 확실히 요즘 한국은 요리가 대세인 것 같다. 엄청나게 많은 요리 프로그램들이 케이블 TV채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은 과거에 무한도전이 한창 인기였을 때 거의 모든 케이블 TV 에서 재방송이 나오고 있던 것을 연상케 할 만큼, 다양한 채널에서 재방송이 송출되고 있었다. 꼭 냉장고를 부탁해 뿐 아니라, 다양한 버전의 요리 프로그램들이 채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마침 인터넷을 들어가보니 강레오 쉐프와 최현석 쉐프라는 두 사람간의 디스 및 오해 풀기 내용이 인기 검색어에 오르고 있다. 사실관계야 내가 알 수 없지만, 흔히 말하는 스타 쉐프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의 요리 붐은 내가 볼 때에서는 3 가지 측면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언론과 TV프로그램들이 만들어 낸 소재 찾기의 한 측면
두 번째는 스타쉐프 및 그들의 레스토랑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 증폭 측면
마지막은 일반 대중들이 먹거리에 대해서 관심이 생활의 중심을 차지한 측면이다.

첫번째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서로 똑같은 컨텐트를 찍어내고 있으니, 한 두명의 승자로 압축이 되고, 나머지는 자연도태된다. 단기적인 트랜드.

두번째는 좀 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외식비율이 증가하고, 맛집 트랜드가 민감해지고, 덩달아서 맛집브로거나 일부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Zagat, Michelin 같은 정보에 대한 니즈가 늘어나는 등의 효과를 수반했다. Wolfgang같은 뉴욕 최고의 스테이크 하우스가 급기야 한국에 지점을 냈다고 한다. 처음에는 엄청 비싼 가격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할 수록 미국이나 유럽에서 고급 스테이크를 먹어도 10만원 이상 하기가 어려운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볼프강이 들어오기 전부터 10만원 정도의 스테이크는 강남에서 발에 차일 정도였다. 도쿄를 보면 유럽의 웬만한 도시보다 더 좋은 레스토랑이 많은데, 우리나라도 사람들의 관심에 힘입어 결국에는 고가의 좋은 레스토랑들이 더 많이 생기고 사람들의 미식에 대한 관심은 더 커질 것 같다. 좀 더 중-장기적인 트랜드.

마지막은 중요한 변화다. 사람들이 요리프로그램을 집에서 시청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게다가 요리프로그램에서 소개하는 식재료들 중에서는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도 많이 있지만, 의외로 과거에 보지 못했던 것들도 많다. 나는 최근까지 한국의 프리미엄 수퍼마켓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이 좀 있었는데, 이런 추세라면 홀푸드나 Dean & Deluca 같은 프리미엄 수퍼마켓들도 얼마든지 많이 생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요즘 외국에서는 반조리 혹은 간단 조리만으로 집에서 요리를 쉽게 해 먹을 수 있는 서비스 혹은 기업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곧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 것 같다. (이미 그런 회사들이 있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이 트렌드는 아주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사람들의 생활을 더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다.

3. 가뭄과 역병

분명 장마라고 했는데, 서울의 날씨는 쨍하고 더워서 놀랐다. 내가 탄 비행기는 분명 암스테르담 출발 인천 도착 KLM 직항 편이었다. 네덜란드에서는 2014년 이래 MERS발병 기록이 없는 곳인데, 한국 사람들은 마스크를 쓴 사람이 많다.

역사책으로만 보던 가뭄과 역병이 피부로 느껴졌다. 암스테르담의 친구들도 뉴스를 통해서 한국의 소식을 접해 듣고 모두 알고는 가끔 내 가족의 안부를 묻곤 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북한도 가뭄이 심하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많이 했다. 프랑스 혁명이나 중국의 왕조 교체 등 역사적으로 국가의 흥망에는 가뭄이 큰 역할을 했다는 증거들을 나에게 알려주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대한민국정부는 민주적인 정권교체가 되는 곳이니 대통령이 욕먹고 지지율 떨어지고 선거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얻는 정도라고 쳐도, 북한은 정말 큰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이러다가 정말 혁명이나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는 귀국길이었다. 물론 그들은 아직까지는 가뭄과 역병중에서 역병은 크게 겪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또 사태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불안하다.

4. 상담원의 친절함

이 부분은 처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외국을 다녀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으로 우리나라 상담원들은 친절하다. 공항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물론 정지해 놓았던 핸드폰 계정을 다시 살리는 일이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상담원과 통화하는 일 자체가 오랜 시간의 기다림을 수반하는 일인데, 우리나라는 어쩌면 이렇게 빨리 연결이 되고, 게다가 또 친절한지 모르겠다. 그만큼 많은 감정노동자들이 고용되고 낮은 가격에 착취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그 내막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고객 입장에서는 편리하고 또 기분이 좋다.

내 나라의 말로 나에게 친절하게 상담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기분 좋은 것은 외국에 다녀올 때마다 느끼는 점이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불친절하고 느려터진 상담원들에게 시달리다가 한국에 오면, 나는 한국에서는 다시는 어떤 상담원에게도 컴플레인을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천재 소녀 사건과 거짓말의 성립조건

 

워싱톤 포스트에서도 이번 하버드-스탠포드 합격 사실을 거짓으로 말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국내 언론 뿐 아니라 해외 주요 언론에서도 이런 시각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한것 같고, 제3자의 시각에서 한국의 비뚤어진 교육제도, 그리고 부모님과 사회의 기대를 채우기 위한 학생들의 압박감에 대해서도 잘 다루고 있다.

http://www.washingtonpost.com/local/education/harvard-stanford-admissions-hoax-becomes-international-scandal/2015/06/18/4abac970-156a-11e5-89f3-61410da94eb1_story.html

이 기사를 읽고나서 우연히 거짓말에 대한 아래 TED Talk를 보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거짓말은 상호적인 것 (Lying is a cooperative act)” 라는 말이 와닿는다. 거짓말은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이 동의해야만 성립한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what you’re hungry for)과 이상을 이어주는 거짓말이 등장할 때 상대방이 기꺼이 믿어준다는 것이다.

굉장히 인사이트 있는 말이다.

그녀는 그녀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브릿지(Bridge)를 찾기 위해서 거짓을 말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가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랬기에 그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런 천재 소녀가 등장하기를 기대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거짓말을 덥썩 받아들이고 모든 언론들이 앞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을 수 있다.

그렇다. 거짓말은 상호적인 것이다.

***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나라에서 정치가들처럼 많은 의심을 받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

나는 개인적으로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컸던 사람인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사상 최고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니 말이다. 온갖 스캔들에 대해서 무언가 솔직하지 못하다는 느낌은 많이 있었지만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그의 말을 믿어주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과거에 대한 면죄부를 주었고, 대신에 일을 똑바로 해주기를 바랬던것 같다. 왜냐하면 믿고 싶었으니까…

2012년 대선에서도 우리는 박근혜 당시 후보의 말을 많이 믿어주었다. 요즘들어 부쩍 온라인에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글들이 많다. 대통령으로 뽑아 놓은지 불과 2년 반만인데, 이렇게 또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참 드라마틱 한 일이다. 무능력함에 대해서 비판도 많지만, 애초에 했던 말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을 두고 비판이 많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었던 말들만 믿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말만 들으니 말이다. 상대방이 너무 내가 듣고 싶은 말들만 할 때는 그 말이 사실인지 검증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철저하게 검증을 했는지, 아니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는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믿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일이다. 혹은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믿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

위의 TED Talk 말미에 보면 Pamela Meyer는 거짓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거짓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면, 다음부터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시그널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계속 어물쩡 넘어가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천재 수학소녀 사건으로 본 한국인의 미국 대학 사랑과 한국 교육에 대한 실망

 

천재 수학 소녀 사건 때문에 모두들 난리다. 아직 이 사건이 확실히 사기극인지 아닌지 드러나지는 않았는데, 이미 논란 자체만으로 후폭풍이 엄청나다. 누가 어떻게 만들어 낸 말들인지 몰라도,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대단한 사건으로 남을 것 같기도 하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6100646231&code=970100

일명 천재 수학소녀가 하버드와 스탠포드에 동시 합격하면서 두 대학을 2년씩 다니기로 했다는 이 소식은 처음에 거의 모든 일간지와 심지어 TV 뉴스를 통해서까지 보도 된 것으로 안다.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스토리 안에는 여러가지 한국인들의 심리가 담겨 있는데 그 중에서는 한국 사람이 우수하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심리와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하버드와 스탠포드 대학을 진학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한 대리만족 혹은 부러운 감정일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유독 해외의 명문 대학을 좋아하는 것 같다. 예전에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화제가 되었을 때, 사실 나는 좀 의아했다. 나도 호기심에 이 책을 사서 읽어봤는데, 이 책은 거의 99% 논리학 책이었다. 그것도 아주 아주 깊은 수준으로 논리철학에 대한 책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당시에 아무리 ‘정의’라는 것이 화두가 되던 시절이라고 해도, 말도 안되게 이 책이 많이 팔렸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저자가 하버드 교수이기 때문이 큰 것이다.

그 덕분에 덩달아서 ‘프린스턴 대학 명강의’, ‘예일대 명강의’, ‘와튼 비즈니스 스쿨 명강의’ 등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책들이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코너에 오르는 것을 종종 보게 되었다. 역시 학교”빨”이 먹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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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해외 명문대는 아마도 미국의 3대 명문으로 꼽히는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그리고 스탠포드, MIT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 이외에 컬럼비아, 코넬, 브라운, Cal-tech, UC Berkeley 등은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한국 사람들이 환상을 갖고 경외심을 갖는 명문대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 다음에 영국의 옥스포드나 캠브리지 정도가 한국에서 그래도 학교빨이 잘 먹히는 해외 명문대이다.

 

그런데 사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녀본 많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미국은 훨씬 다원화된 구조가 존재한다. 꼭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스탠포드, MIT같이 누구나 다 아는 그런 대학이 아니더라도, 동네에 숨어 있는 어떤 대학에 의외로 세계 최고의 학과가 존재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건 그 분야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나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통하는 것이고, 한국의 대중과 언론들에게는 일단 위에서 말한 5개 학교 정도는 관련된 이야기 혹은 사람이어야지 뉴스의 가치가 있다.

 

나 또한 이런 한국인의 미국대학에 대한 환상과 존경심과 경외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왜냐면 내가 그런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왜 그러했는지를 물어본다면, 사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 교육에 대한 실망이 컸다. 나 스스로가 외고를 나오고 명문대를 나온 한국 교육 최고의 수혜자일 것이다. 그런데 나의 자식에게 내가 받은 똑같은 코스로 한국의 교육을 받게 하겠냐고 묻는다면 꽤 망설여진다. 나 스스로는 분명 국내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수준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내가 받은 교육에 대해서 행복하지 않게 느끼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 실망감에 나도 미국 유학을 결심했었다. 한국 대학은 명문이라도 가보니 별것 없더라… 미국 좋은 대학이라는 곳에 가보면 별것 있겠지? 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경영학 쪽에선 그래도 꽤 좋다는 곳으로 MBA를 갔지만, 솔직히 받은 교육이 한국과 아주 심하게 다른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미국의 교육제도를 겪어보면서 돈으로는 살 수 없을만큼 소중한 것들을 느끼기는 했다. 그것은 그들이 강조하는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등의 트레이닝의 중요성이었다. 이 부분은 외우고, 외우고, 외우고, 외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의 교육만 받아온 나에게 뭔가 새로운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MBA라는 코스의 특성상 바쁜 회사생활에서 돌아보지 못했던 회사일의 중요한 원칙이나 몇가지 경영 기술들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 유학을 결심하며, 그 결심의 순간에는 자기 자신이 명문대학에 합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특히 명문대학에 합격하지 못할 경우에 받는 실망감이 매우 큰 것 같다. 그래서 때로는 거짓을 말하기도 하고, 또 스스로를 질타하기도 한다.

얼마전에 미국에서 꽤 좋은 Liberal Arts College에 다니다가 암스테르담으로 오게 된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꽤 인사이트 있는 이야기를 내게 해 주었다. (한국에는 Liberal Arts College가 없지만, 미국에서는 참 좋은 대학이 많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이다.)

미국에서 계속 쭉 살꺼면 미국에서 어느 정도 좋은 학교만 나와도 되는데, 한국에 돌아올꺼면 위에서 언급한 하버드, 스탠포드 등등을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에서는 어디를 나왔다고 해도 잘 모르고, 학비를 내고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었다.

공감을 했던 이유는 나 스스로가 Northwestern 을 나왔기 때문. 이 학교는 내가 나왔지만 참 애매한 학교이다. 일단 한국에서의 일반 대중이 모르고, 일부 사람들만 안다. Alumni Newsletter 에 학교 브랜딩 이슈가 종종 다뤄지기도 한다. (역시 미국은 대놓고 토론하는 문화다. 우리학교 브랜드에 문제가 좀 있으니 바꾸자고 말이다) 이 학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일부라 함은 나와 같은 업계에 있거나,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대부분. 그래서 Northwestern을 다녔다고 하면 상대방이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거기서 더 당황스러운 것은 그 옆에 있는  제 3의 사람이 내가 당황한 줄 알고, 그 사람에게 ‘거기 유명한덴데 몰라?’ 라고 말해줄 때이다. 하지만 유명한 곳은 누군가가 유명한 곳이라고 귀뜸을 해 주지 않아도 알아야 유명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또 뭐, 모를 수도 있지….

이런 상황을 피하려면 아예 처음부터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MIT, 스탠포드를 나오면 된다. 여기 5군데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이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무조건 좋은 학교라는 사실은 안다. 무슨 과인지도 심지어 상관이 없다. 여길 나왔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경외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본다.

그래서일까, 이런 곳들을 나왔다고 거짓을 지어내서라도 들어가고, 혹은 들어갔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으니 말이다.

예전에 대학교때 교환학생으로 갔던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설립자인 오오쿠마 시게노부가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해서 감명 깊었다.

“국가의 독립은 학문의 독립. 학문이 독립되어야 그 나라가 독립된다” 는 말이었다. (원문은 좀 다를 수 있음)

이 글을 읽고 우리나라의 대학에서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미국 대학 출신이라는 점이 생각이 나서 슬펐던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의 학문은 독립된 것일까? 아니, 우리는 독립된 것일까? 꼭 누구나 들어본 미국의 명문대를 나와야만 그 인생이 더 의미있어지는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변경과 근경 –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를 읽고

 

나는 “누구누구의 정말 팬입니다.”라는 말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TV에서 연예인들에게 ‘누구누구씨의 정말 팬이에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신기하기까지 하다. 누군가의 ‘진정한 팬’이 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기준일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누구의 노래 혹은 연기 혹은 작품을 좋아하는 것과 팬이 된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팬이면 그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알아야 할 정도로 많이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걸까?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는 자신있게 누군가의 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인가 있다. 그들은 무라카미 하루키, 키스 자렛, 유희열, 김구라, 김정운 교수님 그리고 REM이다. 하루키, 키스자렛, 유희열, REM 은 고등학교때부터 좋아했으니, 거의 20년 가까이 되었고, 김구라는 10여년 가까이, 그리고 김정운 교수는 그나마 가장 최근에 책을 읽으면서… 그래도 이정도 기간을 그들의 글과 말과 노래를 꾸준히 좋아해 왔다고 하면 팬이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중에서도 오늘은 하루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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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에 스코틀랜드 여행을 다녀오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라는 책을 읽었다. 하루키의 책을 거의 다 읽었지만, 이 책은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2015년 4월에 2판이 재발매 형식으로 나온것 같아서 읽게 되었다. 무려 1999년에 초판이 나온 책이다. (한국에서 이 책을 구매해서 가져다준 승엽이에게 다시 고마움을 전한다)

나는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영감을 얻는다. 그의 글은 소설도 재미있지만, 수필이나 여행기에서 그의 평상시의 말투나 생각이 더 잘 드러나서 더 흥미롭기도 하다. 평소에 만나는 사람들이나 가는 장소에 대해서 느끼는 그의 감상들을 아주 솔직하고 담백하게 쓰기 때문이다.

이 책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라는 책의 일본어 제목은 Henkyo Kinkyo (변경, 근경) 이다. 즉, 변경은 아주 멀고 낯선 다른 곳을 말하는 것이고, 근경은 가까운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미국, 멕시코, 만주, 몽고, 일본 등지를 오가면서 쓴 여행기가 망라되어 있기 때문에 “변경, 근경”이라는 책의 제목은 아주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루키 에세이 책의 제목은 보통 편집자들이 정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 경우에는 하루키가 직접 짓지 않았을 수 있다)

이 책의 서문을 보면 이 책의 제목에 깊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렇게 누구나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어서 이젠 변경이라는 것이 없어져버렸고, 모험의 질도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탐험’이나 ‘비경’과 같은 말은 점점 진부해져서 현실적인 수준에서는 거의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TV에서는 지금도 ‘비경’ 어쩌고 하는 옛날식 타이틀을 붙인 방대한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고지식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여행기를 쓰기에 그다지 행복한 시대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여행을 하는 행위의 본질이 여행자의 의식이 바뀌게끔 하는 것이라면, 여행을 묘사하는 작업 역시 그런 것을 반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 본질은 어느 시대에나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행기라는 것이 가지는 본래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디어디에 갔었습니다.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했습니다’ 하고 재미와 신기함을 나열하듯 죽 늘어놓기만 해서는 사람들이 좀처럼 읽어주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일상에 인접해 있는가?’ 하는 것을 (차례가 거꾸로 되더라도 좋으니까) 복합적으로 밝혀나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도 또 정말 신선한 감동은 그런 지점에서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처럼 변경이 소멸한 시대라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 속에는 아직까지도 변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추구하고 확인하는 것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그런 궁극적인 추구가 없다면, 설사 땅끝까지 간다고 해도 변경은 아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시대다” – 서문에서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반성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근에 내가 이 블로그를 소홀하게 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최근에 하고 있는 일들을 제외하면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변경에 살고 있으면서 근경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암스테르담에서 벌써 4개월 이상 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수 많은 곳들을 여행하고 있음에도 이 블로그를 소홀하게 했던 것에 큰 반성을 했다.

동시에 이 블로그 이외에 내가 집중하고 있는 블로그가 http://www.beertourist.kr 인데, 이 블로그에서는 하루키가 말한 것 처럼 ‘여기에 갔었습니다.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했습니다.’ 와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던 것 같아서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수많은 맥주 여행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데, 그로 인해서 그 이후에 내가 무엇이 달라졌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잡아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누구를 꼭 만나서 하루 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꼽을 것이다. 만나서 맥주를 한잔 하고 싶은 사람도 하루키, 같이 조깅을 하고 싶은 사람도 하루키, 같이 책을 읽고 싶은 사람도 하루키. 그의 글로 인해서 많은 모티베이션과 자극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를 만날 수 있다면 주저없이 바로 이야기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씨, 정말 팬입니다’ 

 

포터/스타우트 5종 비교시음 (Kernel 3종 + Fuller’s London Porter + St. Peter’s Old-style Porter)

 

포터랑 스타우트가 뭐가 다르냐?

평소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쉽게 말해서 포터와 스타우트는 역사적으로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두 가지 장르의 맥주는 같은 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부턴가 갈라진 길을 따로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시점에서 어떤 서브 장르의 맥주를 놓고 이야기하느냐에 따라서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스타우트에는 roasted barley 가 들어가야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이 논쟁은 끝이 없이 계속되고 있고, 외국의 맥주 사이트들의 포럼을 봐도 명확한 답은 없다. 심지어 몇몇 미국의 브루어리의 브루마스터들은 술을 다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포터로 이름을 지을까 스타우트로 이름을 지을까 고민한다고 할 정도니까, 실무적으로는 아주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참고로 포터와 스타우트의 역사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윤한샘 님이 비어마스터클럽에 올린 아래 글은 일독을 할 가치가 있다.

 

http://beermasterclub.co.kr/?p=2879

 

물론 포터와 스타우트가 뭐가 다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떤 포터, 어떤 스타우트에 대해서 물어보느냐? 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다. 포터나 스타우트는 어떤 장르에 대한 지칭이기도 하지만, 서브 장르를 엄청 많이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BJCP의 가이드라인 (2015년 현재 드래프트 버전)에 나오는 포터와 스타우트만 10종류가 넘는다.

– English Brown Porter

– American Porter

– Baltic Porter

– Irish/ Dry Stout

– Irish Extra Stout

– Sweet Stout

– American Stout

– Oatmeal Stout

– Tropical Stout

– Foreign Export Stout

– Russian Imperial Stout

X축을 술의 도수(ABV), 그리고 Y축을 IBU(International Bittering Unit)으로 놓고 BJCP에 나오는 맥주들을 플롯팅을 해 보면 아래와 같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포터랑 스타우트가 어떻게 다른가요?’ 라고 물어볼 때에는 American Porter와 Irish/Dry Stout가 어떻게 다른지 혹은 English Porter와 Irish Stout가 다른지를 묻는 것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이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스타일이 다름을 BJCP 가이드라인이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American Porter와 Irish Stout는 도수 자체에서 오버랩이 없어서 명확하게 구분이 될 수 있고, English Porter (Brown Porter) vs. Irish Stout (Dry Stout)의 비교도 Bitterness 에서 스타우트가 일반적으로 더 높게 나타나기 때문에 오버랩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약간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포터랑 스타우트랑 뭐가 다른가요? 라고 할때는 보다 폭 넓게 장르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넓게 보면 크게 다르지 않고, 세부로 들어가면 구분이 된다.” 인 것 같다.

여기까지가 포터와 스타우트 이론에 대한 이야기였고, 본격적으로 오늘의 시음 이야기를 해 보자

Kernel Brewing의 대표적인 스타우트와 포터가 3종류가 있다.

– Export india porter

– Export Stout London 1890

– Imperial Brown Stout 1856

이렇게 세 종류의 맥주를 시음해 보기로 했다. 모두 Ratebeer.com에서 99점 혹은 100점의 평가를 받는 맥주들이라서 기대가 컸다. 이렇게 좋은 맥주를 한꺼번에 시음하는 것은 무척 설레는 일이다.

비교시음에서 영점을 잡기 위해서 Fuller’s London Porter를 준비했다. 그리고 궁금해서 한번 구매하였던 St Peter’s Old Style Porter 도 이 참에 한꺼번에 시음을 하였다.

맨 오른쪽의 병은 Export Stout London 1890을 예전에 마셨던 병인데, 신기하게도 1달 전에 구매한 것은 도수가 7.1% 였는데, 최근에는 7.4%로 올라가 있었다. Kernel에서 아마도 도수 조절을 한 모양이다.

 

 

먼저 가볍게 런던 포터, 즉 English Brown Porter 두 종류를 시음하였다. 특히 Fuller’s London Porter는 English Porter 라는 장르를 가장 대변하는 맥주이다.

– London Porter : ABV 5.4%

– St. Peter’s Old Style Porter: ABV 5.1%

 

 

두 맥주 모두 대표적인 English Porter 혹은 Brown Porter였지만, 맛은 조금 다르다. 겉보기나 헤드의 유지, 바디감 정도 등은 거의 비슷했지만, 향에서 St. Peter’s는 훨씬 카라멜이 강했고, Fuller’s는 초콜렛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재미있는 것은 둘다 영국 정통 포터답게 아주 불투명한 검은 색이라기 보다는 약간은 루비 빛이 돌면서 투명도가 느껴졌다는 점이다. 실제로 brown porter는 SRM(색을 나타내는 정도)이 American Porter 혹은 Stout보다 약간 낮기는 하다.

이는 다음으로 시음한 Export India Porter (5.9% ABV)와 비교해서 보면 아주 명확하다. 왼쪽이 English Porter이고, 오른쪽이 Export India  Porter이다. 사실 Export India Porter라는 것은 스타일은 아니지만, 좀 더 Baltic Porter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도수는 5.9% 정도로 Baltic Porter의 일반적인 스타일보다는 약간 낮았지만, 훨씬 Fruity 했다.

 

 

Export Stout는 확연하게 헤드도 더 크리미하고, 색깔도 불투명한 검은색이다. 향은 완전 에스프레소 커피 혹은 볶은 커피 콩 향이 돌고, 약간의 너트, 바닐라, 초콜렛이 느껴졌다. 명확한 풀바디에 7.4% 라는 알콜이 어느 정도 입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비터는 물론 강한데, 홉비터의 영향도 있지만, 몰트 자체에서 주는 탄 곡식의 맛에서 오는 쓴 맛도 남아 있는 것 같다. 홉 향은 거의 없지만 약간 Earthy (흙 느낌)을 느낄 수는 있다.

Export Stout를 마시다가 다시 영점을 잡기 위해서 London Porter를 마시면, 런던 포터는 거의 물바디에 너티한 캐릭터남 남고, 초콜렛이나 커피 향은 많이 중화되어 버리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음한 Imperial Brown Stout는 무려 10.2%이다. Russian Imperial Stout는 원래 8-12% 정도이므로 딱 중간이기는 한데, Brown 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으로 보아서 Brown malt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겉보기로 색을 볼 때에는 거의 불투명한 커피, 흔히 말하는 간장색이다.
물론 스타우트라는 큰 장르안에서 나타나는 커피, 초콜렛, 토피, 탄 곡식 맛 등이 기본적으로 백본을 형성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건포도, 건자두, 자두와 같은류의 과일 플레이버가 나타나는 것이 다른 맥주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평소에는 한종류의 술만 마시는 경우가 많아서 이렇게 포터와 스타우트들을 늘어놓고 비교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도 큰 마음 먹고 비교시음을 해 본 것이었는데, 결론적으로는 …

런던 포터의 두 종류는 둘 다 좋긴 했지만 St Peter’s Old Style Porter 처럼 카라멜 스러운 포터보다는 그래도 Fuller’s의 초콜렛이 더 입에 맞는 것 같다.

아울러 Porter, Export Stout, Russian Imperial Stout 의 구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과일 향이 나는 Imperial Stout 종류보다는 커피향이 진동하는 Export Stout (Foreign Extra Stout) 가 가장 취향에 잘 맞았던 것 같다. Export Porter 라는 스타일은 좀 애매했으며, Russian Imperial 은 아주 훌륭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자주 마실 수는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