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웃음’과 나꼼수의 ‘웃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웃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웃음’을 읽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서스펜스적인 요소와 과학적인 모티브, 그리고 많은 역사적, 철학적 요소를 소설 안에서 녹여내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웃음’ 이라는 이 소설도 예외가 아니다.

‘웃음’은 ‘살인소담’ 이라는 전설적인 “유머”를 찾아나서는 것이 그 주된 스토리라인이다. 프랑스 최고의 코메디언이 갑자기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그는 살해될 당시에 분장실에서 혼자 있었다. 이 사건을 추적하는 기자는 그가 죽기 전에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는 주변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 코메디언이 죽기 전에 ‘살인소담’ 즉 너무 웃겨서 죽을때까지 웃게 되는 이야기를 읽고 죽은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경찰은 단순한 사고로 결론지은 사건에 대해서 ‘살인’으로 갈피를 잡은 이 기자는 누군가 고의로 그 코메디언에게 ‘살인소담’을 전해주었다고 믿게 되고, 실제로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살인소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코메디 산업, 유머의 생성과 유통, 그리고 이를 둘러싼 각종 이슈를 둘러싼 음모가 있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아마도 그 이상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스토리 이야기는 그만해야 할듯 하다.

이 소설에서는 ‘유머’, ‘웃음’, ‘우스운 이야기’ 등에 대해서 그 역사적인 기원이나, 인류 사회에서의 의미 등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소설의 스토리가 진행되는 챕터와 챕터 사이에 한 가지 씩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유머들을 읽는 것 또한 꽤 재밌었다.

무엇보다도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말하는 ‘웃음’ 이라는 것은 현실을 초월하기 위한 인간의 한가지 해답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즉, 사람들이 웃음을 짓는 이유는 현실을 잊을 수 있게 해 주기도 하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기도 한다.

이 책에서도 소개되고, 그의 다른 책인 ‘상상력 사전’에서도 소개되듯이 웃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관장하는 좌뇌가 받아들인 정보에 대해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될때, 모든 기능을 포기하고 우뇌로 그 책임을 떠넘기면서 발생하게 된다. 그러면 창의성과 비합리적 사유를 관장하는 우뇌는 좌뇌가 멈춰진 상태에서 그 스트레스이자 에너지를 발산하는 방식으로 ‘웃음’ 이라는 명령을 우리 몸에게 내리게 되며, 그 결과 우리의 횡경막이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의 웃음은 무언가 합리적, 이성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 합리적, 이성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스스로 포기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웃음이라는 것은 의외의 상황, 풍자적인 상황 등에서 자주 발생하게 된다. A라는 상황에서는 B라고 행동해야 할 것 같은데, 의외로 C라는 식으로 결론이 날 때, 우리는 웃음을 짓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이 소설역시 웃음과 유머에 대한 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중세 수도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 이라는 책을 찾기 위해서 벌어지는 이 소설의 내용은, 근엄함이 극도로 강조되는 중세의 수도원 생활 속에서 ‘웃음’의 미학을 강조한 한 책이 오랜동안 금지되어온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이 책이 세상에 공개될 것을 두려워하는 수도사들의 한 무리와 그 책을 찾기 위한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약 틀렸다면 고쳐주시길… 이 책을 읽은지도 워낙 오랜 시간이 흘러서)

우리 역사에서는 많은 경우에 근엄함, 경건함, 신성함, 진실함 등등의 이유로 ‘웃음’을 억눌러 온 경우가 많다.

바로 얼마전에 일어났던 최효종 vs. 강용석 사건도 그런 한 예일 것이다. 국민들에게 ‘풍자’를 선사했던 최효종을 고소했던 강용석 의원의 고소 명목은 ‘모욕’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이면에는 강용석 위원 자신도 여성 아나운서들을 상대로 했던 발언들이 ‘유며’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싶었던 의도가 있다.

그 결말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강용석 의원의 불순한 의도에 대한 국민들의 질타와 ‘유머’와 ‘모욕’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몰상식함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이었다.

사실 어디까지가 유머이고 어디까지가 아닌지는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 책 ‘웃음’에도 예수님의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말했을 때에는 ‘유머’였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즉, 그 당시로서는 너무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어쩌면 웃음을 지으며, 예수님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유머와 인사이트는 종이 한장 차이일 수도 있다.

반면에 유머라는 것이 때로는 배설물에 대한 내용, 음담패설과 성적인 농담들, 살인, 강간, 폭력 등등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은 종류의 ‘더럽고 위엄한’ 소재들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것들이 의외성과 원시성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현대의 ‘깔끔한’ 생활을 살고 있거나, 혹은 그러한 삶을 살도록 강요되는 우리에게 ‘좌뇌’를 멈추게 할 만큼 강한 이유를 주기 때문이다.

나꼼수의 ‘웃음’

그 중에서도 요즘 우리가 가장 즐기는 것 중에 하나는 ‘기득권’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많은 부분은 기득권에게 종속당한 채로, 그들이 정해놓은 원리와 원칙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다. 예컨대 이 좁은 조선 땅 위에서 재벌들의 녹을 먹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재벌들의 성장에 따라서 직, 간접적으로 혜택을 보지 않은 사람을 꼽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우리는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많은 경우에 ‘기득권’에 굽실거리며 살기도 하고, 그들의 불의에 대해서도 눈을 질끈 감고 모른척 할때가 종종 있기도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좌뇌에서 우리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많은 과정을 수반하게 되며, 그때마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라는 변명을 하는지도 모른다.

정치 권력들에게 있어서도, 우리는 어느정도 존경과 함께 비판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MB를 대통령으로 뽑을 당시에 우리는 우리 헌정 역사상 가장 큰 표 차이로 당선시켜 주었다. 그의 많은 결함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경제를 살려야 한다’라는 좌뇌의 명령을 듣고 우리는 그를 당선시켰고, 그의 많은 비리와 실수들에 대해서 한쪽 눈을 감아 주었다.

따라서 100% 이성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득권에 대한 비판, MB에 대한 부정을 하는 것은 대표적인 ‘인지부조화’의 상태로 우리 자신을 몰아 넣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뽑아놓고 비판하는 것은 사실 그를 뽑아 놓은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좌뇌를 멈춰주고, 우뇌로 모든 책임감을 떠넘김으로써 유쾌한 방법으로 현실을 초월시켜 줄 방법을 찾게 되는데, 요즘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나는 꼼수다’일 것이다.

나꼼수를 듣다보면 ‘웃음’이 반 이상이다. 얼마나 깔깔거리면서 웃어대는지 가끔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마저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요즘의 현실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나꼼수의 ‘웃음’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매주 나꼼수를 기다리면서 다운받는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진지하고 경건한 방식의 비판보다는 ‘웃음’을 모티브로 한 나꼼수의 전략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열쇠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한나라당이나 기득권측에서 아무리 podcast를 만들어서 미투(me-too)전략으로 나꼼수와 비슷한 것들을 만들어내려고 해도, 깔깔거리는 ‘웃음’이라는 요소가 빠진 상태에서는 무용지물일 것이고, 그 ‘웃음’ 뒤에는 ‘현실의 초월’ 이라는 인사이트가 들어있기 때문에 현실을 초월할 수 없고, 경건함을 유지해야 하는 기득권층은 절대로 흉내내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진 감독이 연출을 맡고 있는 SNL Korea에서도 정치를 풍자하는 유머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SNL은 미국에서도 너무너무 재미있게 보던 프로그램인데 한국에서도 시작되어서 정말 기쁘고, 게다가 장진 연출이라는 말에 정말 흥분된다.

SNL Korea에서 1회에서 소개된, 최근에 가장 즐겼던 ‘웃음’ 하나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려고 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웃음’과 나꼼수의 ‘웃음’”에 대한 한 가지 생각

  1. 한계에 이른 좌뇌가 책임을 우뇌에 떠넘기며 ‘버럭’한다니.. 글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웃음’이라는 책도 꼭 읽어 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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