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슬로건, 그런데 누구한테 하는 말씀이세요?

들어가며…

M님께서 한발 앞서서 대선 슬로건에 대한 글을 올려주셨다. 나도 주말부터 이 포스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우연의 일치였다. 한국에 계신 M님과 미국에 있는 내가 동시에 비슷한 포스팅을 준비한 것이다. M님께서 나의 의견을 궁금해하셨는데, 나 또한 기본적으로 손학규 후보의 슬로건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포스팅을 참조하시길 바란다.

한 대선 주자의 선거 슬로건에 공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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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선 후보들의 출마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그러면서 후보들마다 자신의 정치 이념이나 정책 방향을 한마디로 간결하게 표현하는 정치 슬로건들도 발표되고 있어서 연일 언론에 거론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잘 정리된 기사는 아래 경향신문의 기사와 SBS 방송인것 같아서 링크를 걸어두니, 이 포스팅을 읽으시기 전에 한번쯤 보시길 바란다.

[경향신문] 대선주자들 ‘잘 만든 슬로건 하나, 열 정책 안 부럽다’

[SBS] ‘못살겠다 갈아보자’에서 ‘국민성공시대’까지

기업의 카피 vs 정치 슬로건

나는 MBA에 오기 전에 마케팅을 했기 때문에, 이런 슬로건이 나오면 관심있게 지켜본다. 사실 기업에서 하는 마케팅과 정치 슬로건과는 큰 차이가 있다. 기업에서 하는 마케팅에서는 이러한 한줄로 자신의 제품의 특징을 알리거나 소비자에게 어필하려는 글귀를 copy(카피) 혹은 selling line, 혹은 communication idea 라고도 하고, 몇몇 회사에서는 big idea 라는 말로 쓰기도 한다. 아무튼 기업의 마케팅에서 사용되는 카피는 일단 명확한 타겟이 있는 경우가 많고, 수많은 광고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에게 기억(register)시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몇몇 후보에게 이목이 집중되고 언론에도 수없이 노출되는 선거 캠페인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기업에서 하는 광고나 카피를 평가하는데에는 여러가지 다른 툴이나 시각이 있을 수 있고, 특히 미국과 한국의 광고문화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아래 링크해 둔 세가지 포스팅을 참조하면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광고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인데, 나는 일단 스토리가 있고, 차별화가 되면서, 일관된 카피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연예인에 의존하거나 지나치게 감정적인 카피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뭐 이러한 광고에 대한 선호도는 사람마다 워낙 다르기 때문에 천차만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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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슬로건들을 보면서 내가 가장 기업의 카피와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굉장히 둥글둥글하다는 것이다. 즉, 기업의 카피는 ‘차별화’라는 것이 주요 포인트인데, 정치인들의 슬로건은 ‘누가 들어도 내 얘기인듯’ 한 느낌을 주어야 하기 때문인지, 도대체 누굴 보고 하는 말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도대체 누굴보고 하는 말인지 모르기는 몇몇 기업의 카피들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미국의 광고 카피들은 숫자나 성분 등을 강조해서 근거(Reason to Believe)를 어필하는 반면, 한국의 기업들의 카피는 감정적인 면을 더 강조한다. 그 중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비판해서 좀 미안하지만) 네이버의 ‘나의 경쟁력, 네이버’라는 카피이다. 도대체 포털 사이트에서 ‘나의 경쟁력’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얼 말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전국민이 보고 있는 페이지인데, 어떻게 ‘경쟁력’을 키울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어떻게?(how?) 도 없다.

2012년 대선의 슬로건들

박근혜 대표가 밝힌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 라는 슬로건 또한, 여기서 ‘내 꿈’의 내가 누구인지 주체가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 ‘내 꿈’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많이 하고, 이를 비꼬는 패러디도 인터넷에 넘쳐나고 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 슬로건은 ‘내가 꿈꾸는 나라’ 라는 진보계열의 시민단체의 카피와 유사해서 표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특히 소통이 부족한 것으로 자주 지적되는 박근혜 후보의 슬로건에 굳이 왜 ‘내 꿈’ 과 같은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마케팅을 해 본 사람이 볼 때 굉장히 의아하다. 그러한 단점이 있었을 수록 좀 더 우회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문재인 대표의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도 구체성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 도대체 무엇보다 먼저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아마도 사람이 ‘가장’ 먼저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일 것 같은데, 말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 같다.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애매하다. 인권이라는 뜻인지, 보건/복지라는 뜻인지, 사람들의 직장과 경제생활과 같은 현실적 고민을 들어주겠다는 것인지… 사실 어느 하나를 택해야 그 뜻이 분명해질텐데, 역시 두루뭉실하게 가고자 한 느낌이 든다. 결국 애매함과 분명함의 경계를 잘 타면서 카피를 짓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인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애매한 선타기에 그나마 성공한 슬로건은 아마도 손학규 고문의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교적 구체적이며, 누구에게 이야기하는지 대략 감이 온다. 저녁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면에서 ‘내 꿈’ 혹은 ‘사람이 먼저’라는 것에 비해서는 훨씬 좁혀진 느낌이다. ‘꿈’ 이나 ‘사람’ 같은 추상적/보편적 단어에 비해서 ‘저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저녁식사’, ‘최소한의 여유’ 혹은 ‘가족과의 시간’을 뜻하는 것으로, 조금 더 좁혀서 해석이 가능하다. 만약 30-40대 직장인들, 노동자들이 부동표의 주류라면 이 슬로건은 타겟을 제대로 공략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두루뭉실한 슬로건들이 나올까?

이러한 대선 슬로건들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계속적 느낌은 ‘두루뭉실하다’ 혹은 ‘애매하다’ 라는 것인데, 마치 사람이 많은 종로 한복판에서 금덩어리를 공중에 던져 놓고, ‘저 금덩어리는 당신들 모두의 것입니다’ 라고 외치는 것 같다. 사람들은 그 공중에 떠 있는 금덩어리를 보면서 모두 자기 금덩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 금덩어리가 땅에 떨어지고 주인이 정해지면 그제서야 그 금덩어리는 자신에게 의미가 없었음을 깨닫게 되는 상황이 연상된다. 최대한 두루뭉실하고, 최대한 애매해서, 최대한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라고 믿도록 만드는 것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어의 표현중에 everybody’s friend is nobody’s friend 라는 말이 있다. 모두에게 친구인 사람은 어느 누구의 친구도 아니라는 뜻인데, 특히 전략적 마인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선택과 집중은 동의어이며, 선택과 포기 또한 동의어이므로, 전략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한다는 말은 포기 또한 잘 한다는 말이다.

이렇듯 모두를 즐겁게 하려는 것은 전형적으로 전략적 마인드가 없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다. 적어도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말이다. 내가 만약 이런 슬로건을 만든다면 차라리 부동층이 누군지 확실히 분석해서 그들에게 의미있는 슬로건으로 밀겠다. 우리나라는 어차피 투표소에 들어가서 누구를 찍을지 정해져 있는 사람이 꽤 많은데, 그들은 어떤 말을 하던지 어차피 찍을 사람이 6개월, 아니 지난 대선때부터 정해져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렇게 꿈쩍않는 사람들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위의 슬로건들을 만든 사람들은 모두 광고계에서 유명한 카피라이터들이다. 예컨대 문재인 위원의 슬로건은 수십년동안 ‘고향의맛 다시다’, ‘초코파이 정’ 등 들으면 딱 알만한 카피를 많이 쓴 광고계 최고 베테랑의 작품이란다. 하지만 기업의 슬로건과 정치 슬로건의 전략적 차이 때문에 결국은 이렇게 두루뭉실하게 카피가 나온게 아닐까 생각된다.

혹은 (나의 가설은) 이러한 슬로건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라는 것이다. 즉, 후보들이 별로 이러한 슬로건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지 않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일단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준이 없는 것 같고, 기준이 있다고 하더라도 후보들 스스로가 이러한 캠페인 슬로건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번 대선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 그런 센스가 좀 없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부정적일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과거 대선의 슬로건들

한편 과거 대통령 선거에서 기억에 남는 슬로건들을 몇개만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97년 김대중, ‘준비된 대통령’
2002년 노무현, ‘새로운 대한민국’
2002년 이회창, ‘나라다운 나라’
2007년 이명박, ‘국민성공시대’

그리고 아래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사용된 슬로건들을 보자

1988 George Bush – Kinder, Gentler Nation
1992 Bill Clinton – Putting People First
1996 Bob Dole – The Better Man for a Better America
2000 Al Gore – Prosperity for America’s families
2000 George W. Bush – Compassionate conservatism
2004 John Kerry – Let America be America Again
2004 George W. Bush – Yes, America Can!
2008 John McCain – Country First
2008 Barack Obama – Change We Can Believe In (Change We Need)

위의 리스트를 자세히 째려보면 굉장히 겹치는 말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1992년 빌 클린턴의 Putting People First는 이번 문재인 위원의 ‘사람이 먼저다’ 라는 슬로건과 2004년 존 케리 후보의 let america be america again은 2002년 이회창 후보의 ‘나라다운 나라’ 와 거의 같은 의미이다. 2000년의 알 고어의 Perpsperity for America’s Families 는 2012년 손학규 고문의 ‘저녁이 있는 삶’과 같은 맥락이긴 하지만, 손 고문의 슬로건이 뭔가 더 시적이고 운치가 있다.

나의 머릿속에 개인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오바마의 ‘Change we can believe in (우리가 믿는 변화)’ 라는 슬로건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서 ‘변화’를 말하는 것은 매우 연관성이 높을 뿐 아니라, (아들) 부시 대통령의 8년간의 대통령 집권 후에 변화를 외치는 것은 시대적으로도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Change, Believe 같은 단어들은 굉장히 미국적이면서도 진보적인 단어들이다.

나가며…

한국의 정치환경은 워낙 다이내믹해서 기업의 제품 전략처럼 짧게는 몇달, 길게는 수년동안 준비해서 쌓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되도록이면 애매하거나 보편적으로 만듦으로써 상황에 따른 유연성을 가지고 가려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재미있는 슬로건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더 실망스러운 것은 이렇게 슬로건을 만든 다음에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일관되게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어쩌면 슬로건들이 두루뭉술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예전 회사에서 일할 때 처음 맡았던 브랜드가 오랫동안 썼던 카피는 ‘한번 열면 멈출수 없어 (Once you pop, you can’t stop)’ 였다. 모두 이 카피가 어떤 제품의 것인지 알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카피가 수십년동안 일관되게 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디테일을 말할 수는 없지만, 내부적으로는 그 카피가 쓰여진 이유에 대해서 브랜드의 구조(architecutre)적 측면에서 정리된 1장짜리 문서가 있었고, 전 세계에서 그 브랜드를 담당하는 마케터들이 그 1장짜리 문서를 째려보면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참으로 체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기에 수십년간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여담이지만, 예전 직장에서의 한 멘토는 그렇게 원칙이 적혀 있는 문서들 (그 회사에서는 보통 1장짜리였는데)을 광고 에이전시와의 미팅이나 디자인 에이전시와의 미팅에 일부러라도 막 흔들면서 들어가거나 문서더미의 맨 위에 두라고 알려줬다. 그만큼 우리는 그 원칙과 기준에 집착한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뜻이었다.

내 생각에 좋은 마케팅 캠페인은 ‘일관된’ 캠페인이다. 나의 좋은 마케팅에 대한 철학은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 하지만 그 이야기의 변이(variation)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Jazz 음악중에서 standard 넘버들을 듣다보면, 일관되게 나오는 멜로디 라인이 있지만, 그 멜로디에 변화를 주면서 곡을 끝까지 끌고 가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일관되고, 차별화되고, 그 후보의 철학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그런 슬로건이 5년 후에는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대선 슬로건, 그런데 누구한테 하는 말씀이세요?”에 대한 한 가지 생각

  1. 슬로건까지만 두루뭉술하면 좋겠는데 공약도 두루뭉술 뭘 하려는지도 모르겠고
    앞으로 지킬지도 모르겠고 ㅎㅎㅎ “저녁이 있는 삶” 정말 가슴에 와닿네요
    하지만 슬로건과 별개로 손학규의 능력에 대해선 의문 ㅎㅎ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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