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A에 와서 책을 거의 안 읽었다. 정확한 표현은 “글은 많이 읽지만 책은 읽지 않는다” 일 것이다. case나 print out 은 엄청 많이 읽고 있는데, 제대로 된 책은 볼 일도 별로 많지 않다. 교과서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내 평생에 철들고 나서 이렇게 책을 읽지 않은 적이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MBA 첫 학기는 나에게 책 읽을 여유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잠들기 전에는 껌뻑껌뻑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 있기에, 나는 책을 한권 읽을 생각을 했다.
9월에 와이프에게 부탁해서 1Q84 3권을 받았다. 참고로 이 책은 내가 미국에 온 후에 나와서, 한국을 떠날 당시에는 책을 살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한글로 된 활자를 봤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이 책은 700 페이지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9월 중순쯤 받아서 10월 말에 읽기를 마쳤으니, 거의 한달이 꼬박 넘게 걸린 셈이다. 이 책의 재미도 재미이거니와, 잠들기 전에 이렇게 두툼한 책을 – 그것도 일본 소설인데 한글로 된 활자를 미국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하루키의 책이야 예전부터 너무 좋아했지만, 이 책은 단숨에 훅 들이키기 보다는 한모금 한모금 아껴 마시고 싶은 음료수처럼 천천히 읽었다. 책 자체도 도톰하고 좋아서,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보기에 딱 좋은 그런 책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랬겠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라는 곡이 궁금해지는데, 나도 아이튠즈에서 다운로드 받아서 들어봤다. 뭔가 묘~한 분위기의 이 음악은 현실 세계가 아닌 1Q84의 세계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이 소설의 모티브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잠에 빠져드는 생활을 지난 한달 동안 했다.
하루키 소설의 특징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벌어질 것 같은 일들에 대해서 너무나 담담하게 그려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잠들기 전에 하루키 소설 몇 페이지 쯤 읽는 것은 나른한 오후에 그것을 읽는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다. 꿈과 같은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나의 뇌에 몇 방울쯤 물감을 풀어놓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느낌은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태엽감는 새나 양을 쫓는 사나이의 모험,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은 다른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는 느껴보지 못한 느낌들이었다. 아마도 그때는 낮에 시간이 많았던 – 삼수생, 군인, 대학생 같은 시절이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어찌되었건 나는 어제 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면서, 낮에는 계속 수학문제들과 회계, 재무 문제들을 풀고, 저녁에 이렇게 하루키 소설을 읽으면서 잠들었던 내 MBA 첫 학기 두달의 시간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