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맥주란 무엇인가?

1997년 신촌

1997년도에 연대 다니던 시절에 젤 친했던 친구는 뉴저지에서 살다가 왔다. 그가 신촌에 ‘거품’ 이라는 술집에 데려가서 어떤 맥주를 마시면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라고 했다. 나도 그 맥주를 병으로 시켜서 하나 마셔봤다. 김에 간장을 찍어 먹는 안주에 수입맥주라는 것이 좀 밸런스가 맞지 않다는 생각도 잠시. 지금까지 마셔왔던 한국의 맥주와는 차원이 다른 풍미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고, 또 다시 탄산과 함께 향이 거꾸로 올라오면서 코를 간지럽혔다. 샘 애덤스였다.

2002년 신주쿠

2002년도에 일본 와세다로 교환학생을 갔다. 공항에서 내려서 몇 덩어리의 짐을 간신히 끌고 신주쿠 타카다노바바 근처에 있는 기숙사에 짐을 풀었던 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편의점에 가서 맥주를 사 와서 마신 것이다. 전후맥락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편의점까지 가서 여러가지 맥주를 사와서 기숙사에서 마시던 장면은 또렷이 기억이 난다. 20대의 나에게 ‘일본맥주 = 프리미엄 맥주’ 였다. 일본에 가서 생맥주를 마시는 것은 큰 특권이자 기쁨이었다. 이자카야에 가서 ‘나마(생맥주)’ 를 외치는 것이 나의 행복 모먼트였던 것 같다.

2008년 도곡동

20대 중반에 접어들었고 취직도 했다. 나는 퇴근 후에 종종 나의 보스와 매봉역 근처의 일본식 이자카야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 당시 나의 보스는 맥주를 좋아했다. 아사히, 삿포로, 기린 등 당시는 일본 수입맥주의 전성기였다. 카스나 하이트가 한 잔에 2500~3500원 정도였던 것 같은데, 수입맥주는 5000원 이상, 비싼 경우에는 7000~8000원까지 했다. 그럼에도 나는 수입맥주를 좋아했다. 어차피 많이 마시지 못하는데, 좋은거 마시자는 생각. 조금만 더 걸어가면 도곡동 타워팰리스 앞에는 와바(WaBar)도 있었다. 여기에 가면 좀 더 다양한 수입맥주를 병이나 생으로 즐길 수 있었다.

2012년 이태원

비즈니스 스쿨을 끝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는 크래프트 맥주를 많이 마셨지만, 한국에서는 다시는 못 마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사 동기가 이태원에 맥파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가면 크래프트 맥주 마실수 있다고 해서 따라갔다. 미국에서 마시던 크래프트 맥주와 유사한 수준이긴 했지만, 당시만 해도 OEM으로 만들 수 밖에 없어서 아쉬운 퀄리티이긴 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그 후로는 이태원 경리단에 자주 갔다. 그러다가 이코노미스트 기자가 쓴 ‘한국맥주가 북한 대동강맥주보다 맛이 없다’는 아티클 때문에 ‘한국 맥주는 맛없다’ 라는 여론이 불같이 일어나더니, 이윽고 수입맥주 4캔에 만원 행사가 시작되었다. 그 행사는 10년간 지속 되었다가 2021년 말에야 높은 물가상승률 때문에 4캔에 11000원으로 1000원 올랐다 .

2016년 성수동

크래프트 맥주 브루어리를 성수동에 창업했다. 고블릿잔 한잔에 4500원으로 시작을 했는데, 사람들은 너무 비싸다고 했다. 수입맥주보다 원재료도 많이 쓰고, 로컬에서 생산해서 신선하고, 소량만 생산하므로 인건비나 여러가지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는 프리미엄 맥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랜 역사와, 높은 마케팅 비용을 지출하는 수입맥주가 더 프리미엄하다고 느꼈다. 실제로 가격도 수입맥주들이 비싼 경우가 많았다. 수제맥주는 파인트 한 잔에 8000원을 받으면 욕을 먹었지만, 수입맥주는 파인트 한잔에 8~9000원 정도 받아도 납득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2021년 서울

나는 2021년에 샘 애덤스 맥주를 오마주한 ‘진라거’ 라는 몰티 라거를 시장에 출시했다. 4캔에 만원이었다.

2022년 용산

극장에 왔는데 네덜란드의 수입맥주가 국산맥주보다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어머니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딸이 맥주를 사고 있었다.

엄마: 엄마는 하이X캔 먹을꺼야

딸: 엄마, 저거 편의점에서 4캔에 만원하는데, 뭐하러 이렇게 비싸게 주고 마셔?

엄마: …..엄마는 그래도 하이X캔 먹을꺼야

MZ세대들은 사회에 진출할 때부터 편의점 4캔 만원을 본 최초의 세대이다. 4캔만원 Native 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 프로모션은 진행되고 있다. 이들에게 수입맥주는 더 이상 프리미엄이 아니다. 게다가 MZ세대는 적어도 유럽과 미국과 일본에 대한 열등감이 우리 세대보다는 덜 하다. 이들에게는 어쩌면 좋은 원재료를 듬뿍 사용해서 신선하게 만든 우리의 크래프트 맥주가 더 프리미엄하게 다가갈 수도 있겠다.

2022년 반포

한 와인수입사 대표님과 저녁자리가 있었다. 30년 넘게 와인 회사를 운영하신 분이었다. 그 대표님은 우리 회사 같은 곳들이 앞으로 시장을 잘 이끌어야 한다고 격려와 기대가 섞인 말씀을 해주셨다. 지금까지 100년 동안의 한국 맥주의 역사는 몇몇 가문 또는 수입맥주에 의해서 주도되는 시장이었지만, 지금은 많은 중소기업들에게 기회가 열리고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우리는 부모님이 일본인인 세대에 태어났고, 전쟁도 겪었고… 일본이나 미국에 대한 열등감과 부러움으로 살았지만, 김대표 세대는 다르잖아? 그보다 어린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말이 계속 귓속을 맴돌았다.

*

2022년 7월 말

우리가 만든 맥주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맥주인 첫사랑 IPA가 편의점에 입점된다. 4캔에 만원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팔린다. 우리 회사의 제품 말고도 4종의 맥주가 함께 들어간다. 편의점에 들어가는 ‘진짜’ 크래프트 맥주인 것이다. 꼭 기억해야 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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