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를 엄청나게 바쁘게 보낸 직장인이 주말에 하루키를 읽는 것은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얼마 전에 하루키의 ‘채소의 기분, 바다 표범의 키스’라는 에세이(수필)집을 샀다. 이 책의 서문에서도 밝히다시피, 소설가가 쓰는 수필집이라는 것은 ‘맥주 공장에서 나오는 우롱차‘ 같은 것이다. 즉, 본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는 그런 것 말이다.
이 에세이집은 하루키가 일본의 앙앙 이라는 잡지에 연재한 것들을 모은 책이다. 10년 전에도 이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서 ‘무라카미 라디오’라는 수필집을 냈었는데, (그렇다, 그게 벌써 10년 전이다!) 이번에 또 다시 비슷한 형태의 수필집이 나와서 반가운 마음에 사서 읽었다. 예쁜 삽화들도 들어가 있어서 읽는 기쁨이 꽤 있다.
나는 고등학교때부터 하루키를 읽었는데, 내가 조숙하거나 그래서 그랬다기 보다는 시대적으로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하루키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한 시기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하루키를 읽고 있는 고등학생을 상상하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재수/삼수 하던 시절은 나의 하루키 사랑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하루키가 자신을 ‘책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나 또한 나를 ‘책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 중에 한쪽 가슴 정도를 만드는데에는 하루키 책들이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최근 하루키의 장편 소설들은 진지하고 공상적인 경향이 점점 강해지는데, (예컨대 해벼의 카프카나 1Q84) 개인적으로는 ‘양을 쫓는 모험’이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류의 경향이 더 심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그런 그의 초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매우 좋아하지만, 노르웨이 숲 류의 좀 더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들도 재미있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그의 에세이는 깊이가 더해지면서, 동시에 너무 무겁지 않은 가벼운 이야기로 채워져 있어서, 오랜만에 참 재미있으면서 인사이트를 주는 책을 읽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주의 직장생활로 몸도 마음도 지쳐있다면, 하루키 에세이 한번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이 수필집에 나온 인상적인 에세이의 한 부분을 옮겨본다. 하루키를 단편적으로 잘 나타내주는 내용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까마귀에게 도전하는 새끼 고양이 중에서…
어찌 됐든 고양이는 필사적으로 쫓아가고,까마귀는 상대를 약올린 뒤 날개를 펼쳐 휙 도망가는 구도가 끝없이 되풀이되다보니 좀 지겨워져서 그 자리를 떴다….(중략)… 그런데 생각해보니 젊은 시절의 나와 비슷하다. “상대를 잘못 만났어, 게임이 안돼” 하고 누가 말려도 나는 넘어야 할 벽이 있으면 꼭 기세좋게 시비조로 덤벼들었다. 자랑이 아니라(그런 짓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이제 와서 반성할 때도 많다) 그것은 단순히 내 천성이었다. 타고난 성격. 바꿀 수가 없다. 보기와 달리(랄까) 흥분을 잘한다. 덕분에 여기저기에서 아픈 경험이 많았다.
내게 까마귀 떼란 한마디로 ‘시스템’이었다. 여러가지 권위를 중심에 둔 틀, 사회적인 틀, 문학적인 특. 당시 그것은 우뚝 솟아오른 돌벽처럼 보였다. 개개인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탄탄한 존재로 그것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저기 돌이 무너지고 벽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환영할 상황인지도 모른다. 다만 솔직히, 시스템이 탄탄했을 때가 싸움이 쉬웠다. 즉, 까마귀가 제대로 높은 가지에 앉아 있을 때가 싸움이 쉬웠다. 지금은 무엇이 도전해야 할 상대인지 무엇에 화를 내야 좋은지 도통 파악하기가 힘들다. 뭐, 눈을 부릅뜨고 보는 수밖에 없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