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쓸수가없다 (스포충만함)

이 영화에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메타포어가 있다.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눈에 띄는 주제는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모순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모순. 어쩌면 모순은 일정한 시간의 선상에서는 변화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과 두시간 반의 시간 동안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사람들 모습 속에서 많은 모순과 변화를 찾을 수 있었다. 여러가지 메타포어와 그들이 어떻게 모순이라는 주제를 계속해서 가져가는지 나름 정리 해 보았다.

나무와 관련된 모순

제지회사에서 수 많은 나무를 벌목하는 만수. 하지만 그의 취미는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이다. 그는 직접 만든 온실에서 분재를 하는 것이 취미이다. 때로는 나무를 꺾고 묶기도 하면서 말이다. 집 곳곳에 분재가 가득하고, 온실에서 시간을 대부분 보내며, 마당에는 나무가 가득한 만수, 그는 이토록 나무를 사랑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나무를 베고 자르는 공장에 다닌다. 심지어 그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극명하게 느껴진 모순이었다. 막상 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해서 문제지의 최선출을 죽이려고 처음 맘을 먹었을 때 조차 아이러니하게도 집어든 살인도구는 화분이었다. 만수의 아버지는 키우던 돼지를 화재로 잃고 2만마리나 스스로 묻어버리고 목을 멘 ‘동물인간’이었고, 만수는 나무를 키우는 ‘식물인간’이다.

한 가장의 생존을 위한 변화

만수는 초반에는 동료직원들이 짤리는 것에 분개하고 마치 내 일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의 종반으로 가면 사람 하나 없는 공장에서 AI로 모든 것이 컨트롤 되는 환경에서 일한다. 다 짤려나갔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 그런 처절한 변화에 대해서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 하다. 오히려 환호성을 지른다. 자신의 생존을 자축하면서 말이다.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실수 투성이로 얼떨결에 살인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는 벌벌 떨다가 살인을 저지르더니, 급기야 마지막에는 대놓고 담대하게 살인을 저지른다. 한 사람이 생존을 위해서 어떻게 흑화 하는지를 이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중년 가장들의 취미생활과 공간

만수에게는 분재와 온실, 범모에게는 LP와 음악실, 선출에게는 위스키와 오두막. 이 영화에 등장하는 중년의 남자들에게는 취미 및 그 취미를 즐기는 자신만의 공간이 있다. 다들 돈이 적지 않게 들어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취미만 즐겨도 꽤 돈이 들지만, 공간까지 마련하는 것은 사실 럭셔리다. 심지어 처음 두 명은 실직자이고, 마지막 선출은 그런 이유로 이혼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이러한 취미와 공간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러면서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모순된 행동이다. 대한민국에서 직장생활만 한 사람들은 실직과 동시에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위협받는다. 그래서 다시 재취업을 하려고 기를 쓰고 노력한다. 이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아이덴티티는 취미생활과 그들의 공간은 아닐런지…

가족의 악행을 덮어주는 과정에서 생기는 신뢰

만수와 미리는 불신의 과정을 거친다. 미리가 외도를 하는지 영화가 명확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모호함만 남기고 말이다. 어찌됐건 댄스 파티 사건이 있던 날 만수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미리는 외도를 하지 않았다. 이로서 부부는 신뢰를 다시 회복한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아들의 범죄였다. 그 과정을 만수가 멋지게 해결해 주었다. 미리는 여자로서의 자존심도 포기하면서 자신의 아들을 지켜야 하나 고민했지만 만수가 그 과정을 해결해주면서 만수와 함께하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만수는 아들의 담배를 덮어준다. 아들은 주먹을 부딪히며 만수를 신뢰한다. 미리는 만수가 묻은 시체를 덮어준다. 또 다시 신뢰의 순환고리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라는 질문은 별개의 문제이다. 친 아들이었다면 과연 담배를 피는 것을 그대로 뒀을까? 절대 그럴리가 없다. 하지만 만수는 친아들이나 다름 없다고 울부짖는다. 술 마시면 때렸으면서… 어쨌든 남편은 아내의 아들을 덮어주고, 아내는 남편의 살인을 덮어주고, 아들은 아빠를 신뢰하고… 이 빌드업이 완성되는 순간 가족의 신뢰가 완성되었지만 그들의 범죄자로서의 고리도 완성되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은 여전히 비행을 함께한 친구와 자전거를 타면서 집을 나선다.

소리는 만수의 압박감의 레벨

구범모를 죽이려고 하는 장면이 첫 살인 시도와 다름 없는데, 이 때 큰 (고추잠자리) 노랫소리가 나온다. 만수의 내적 압박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장치였다. 고시조를 죽이려는 장면에서는 파도소리가 크게 들리고 이 때문에 깜짝 깜짝 놀란다. 하지만 최선출을 죽이려고 할 때에는 술을 마셔서 그런지 압박감이 저하되고 계획적으로 담대하게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 심지어 술을 마시는 그 순간 세상이 만수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주변의 소리가 잦아들고, 만수는 담대해진다. 하지만 막상 마지막에 공장이라는 자신이 가장 그리던 곳에 돌아오면 귀마개를 꽂고 안정을 찾는다. 그렇게 시끄러운 공장이 오히려 만수에게는 가장 안정된 곳이다.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외적세계의 벌목 현장은 소음 투성이인 것이다.

햇빛과 달빛

만수가 일하던 곳은 태양제지. 옮긴 곳은 문(moon)제지. 태양제지에서는 밝은 모습이었지만, 이후로 햇빛은 계속 만수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의 앞에서 반짝이면서 만수의 시야를 흐리게 만든다. 면접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마지막에 아들은 그런 만수에게 햇빛을 가려주고, 이후에 둘은 소통에 성공한다. 최선출을 살해하는 순간은 달(moon)이 밝게 빛나는 밤이었고, 결국 만수는 문 제지로 가게 된다. 양지에서 음지로, 밝음에서 어두움으로. 모순과 변화라는 주제가 반복된다.

썪은 이빨은 죄책감

비도덕적이고 나쁜 짓을 할 때마다 만수에게 알람이라도 울리듯이 아프던 이빨. 앓던 이가 빠지면서 만수는 모든 도덕적 굴레를 벗어난 듯 보인다. 이렇게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장치는 술이다. 이빨을 뽑아내고 나니까 만수는 그야말로 후련하다고 말한다. 도덕적 굴레 속에서 살아가자면 얼마나 괴로운가? 이를 뽑아내고 나니까 너무 후련하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서 그는 범죄자가 되었다. 아내와의 약속도 어겼다. 이 모두 어쩔 수가 없다고 하면서 합리화 해버리는 것이다.

불길함의 상징, 뱀에게 물렸지만…

구범모의 아내 아라는 뱀으로 형상화 된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고, 변화 무쌍한 사람이며, 심지어 직업이 연기자이다. 그 뱀이 사람을 물어버렸다. 하지만 아라는 만수를 치료해준다. 옳지 못한 방법이지만 모순적이게도 치료가 되었다. 그리고 종반에는 심지어 아라 덕분에 만수는 범죄에서 벗어난다. 뱀에 물렸다고 해서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그 뱀이 스스로 알아서 행운을 물어다 주었다. 뱀은 동양에서나 서양에서 다 좋은 이미지의 동물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는 모순되게도 뱀이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나쁜 일이지만 좋은 일로 귀결되었다. 이 또한 모순이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주는 신발 선물

첫 장면에서 만수는 아내에게 구두를 사준다. 한국에서는 구두를 사주면 도망간다고 선물로 잘 사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만수의 아내는 남편이 자신있나보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시조를 만나러가서 딸의 에나멜 슈즈를 사주려고 한다.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가족들이 주는 생계에 대한 압박감에 가장은 그들을 언젠가는 떠나보내고 혼자 온실에서 분재를 키우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가족을 너무 사랑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혼자 있고 싶기도 한 인간의 모순된 심리.

딸의 재능은 가족의 미래

만수 딸의 첼로에 대한 재능은 아마도 가장이 끝내 지키려고 했던 가족의 미래가 아닐까 생각한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아직 내 눈 앞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고, 발전하고 있다. 아직 부모들이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조금만 영양분을 주고 잘 가꾸면 금새 그 재능은 피어난다. 만수가 그렇게 죽기살기로 지키고자 했던 가정은, 그리고 그 가정의 꿈은 아마도 딸의 첼로에 대한 재능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쩔 수가 없지 않다

이 영화에서는 여러번 ‘어쩔 수가 없다’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사실 어쩔 수가 있는 경우들이다. 직원을 많이 감축하지 않고, 큰 집을 포기하고 아파트로 이사하고, 취미를 포기하고 돈을 아끼고, 제지 회사 다니지 말고 카페를 차리고, 다른 일을 찾고, 와이프가 일을 하고 등등. 다른 대안은 얼마든지 있었다. 등장 인물들은 계속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 것은 아마도 모든 관객들이 느낀 모순이었을 것이다.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자기 합리화의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나온다.

나가며…

박찬욱 감독이 15년간 준비한 영화라고 하는데, 각본이나 촬영은 정말 좋았다. 내 인생영화가 올드보이였는데, 이번참에 어쩔 수가 없다고 바꿀까?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가 미쳤다. 연기가 거슬리는 배우가 하나도 없다. 그냥 다 잘 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병헌 배우의 표정 하나하나가 다 명품이었고, 인생 최고작을 건졌다고 생각한다.

이성민 배우는 평소 술을 한방울도 못 마신다는데, 어떻게 이렇게 알콜중독자 연기를 잘 할 수가 있는지… 후반부에 나오는 박휘순 배우의 만취 연기는 100점이다. 손예진 배우가 연기를 이렇게 잘 하는 사람인줄 몰랐고, 염혜란 배우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만수의 딸로 나온 아역배우는 앞으로가 기대된다.

다만 단역들까지 유명 배우로 꼭 써야 했나? 라는 생각도 좀 들긴 했다. 김해숙, 유연석 등이 나온 분량은 크지 않았는데, 좋은 신인들을 많이 썼다면 좋았겠다는 생각 정도.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도 한참동안 너무 많은 생각이 맴돌아서 리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블로그가 영화 리뷰 블로그도 아닌데… 안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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