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요로 다케시

도쿄대학교 명예교수이자 해부학자인 요로 다케시 교수의 책.

먼저… 솔직히 고백하건대 어떻게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내 책장에 ‘읽지 않은 책’ 섹션이 있는데, 거기 있길래 읽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구입하게 되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책인데,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어쩌면 조금은 철학적인 주제인 ‘우리는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내용에 대해서 쓰고 있기는 하나, 구성은 아주 중구난방이다. 2-3 페이지 정도의 짧은 에세이들의 모음집이라고 볼 수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무엇을 향해서 달려가는 구조는 절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나?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노’이다. 2022년에 88세의 저자, 그것도 해부학이라는 한 분야의 대가로 평생 살아온 도쿄대학 교수가 ‘노’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편으로 불교 철학과 닮아 있는 이 책의 내용은 나도 변하고, 대상도 변하는데, 무엇을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이나 할까? 라는 논지로 흘러간다.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유는 저자가 워낙 분명하게 단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단정하지 않는게 이 책의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저자는 알고 모르고에 앞서서 행동의 중요성과 몸을 움직이는 것, 특히 자연 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행위에 대해서 중요하다고 여러번 강조한다. 자연과 괴리된 도시의 삶을 ‘뇌화’ 되었다라고 이야기 한다. 특히 소셜미디어에 대해서 경고하면서 ‘뇌화’되었다고 한다. 움직임은 없고, 생각과 의식만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누워서 쇼츠를 볼 때 딱 이런 상태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구절이었다.

그 외에도 자연 속에서 아이들을 길러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강조, 도식적 사고방식에 대한 경고 등은 깊이 와 닿았다. 자신이 소셜미디어의 노예가 되어가며 점차 도시 안에서 ‘뇌화’되어 가고 있음을 슬퍼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볼 만 한 책이다.

요컨대 나는 개인적으로는 불교철학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책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한 책이다.

책에서 언급된 몇몇 문장을 갈무리하며 마무리 하고자 한다.

  • 직업을 바꿀지 자기 자신을 바꿀지 선택해야 한다면, 자신을 바꿔서 그 직업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믿 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계속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정말로 좋아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나를 전제로 하는 사고방식입 니다. 하지만 나 자신은 계속해서 달라지니, 그걸 정말 좋아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 물을 마실 때도 우리는 마시고 싶으니까 마신다고, 곧 의식의 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뇌가 ‘이렇게 해야 지’ 하고 생각해서 행동이 따라온다고 믿는 사람이 많지 만, 사실은 반대입니다. 뇌를 측정해보면 우선 물을 마 시는 행위와 관련된 부분이 확실히 먼저 움직이고, 그 뒤에 ‘물을 마셔야지’ 하는 의식이 일어납니다. 의식은 뇌가 그 방향으로 향하고 움직인 후에야 따라옵니다. 이 처럼 과학적 측면에서도, 인간이 반드시 자신의 의도로 무언가를 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 이런 점을 무시한 채 ‘안다”모른다’를 논해봤자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아래에는 무의식과 무의미가 숨어 있죠. 타인의 무의식과 무의미를 과연 이 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빙산의 일각만 보며 의미를 찾고 서로 통할 거라고 믿습니다. 인간은 더 겸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행동을 전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을 버려야 합 니다.
  • ‘사람을 대하는 세계’든 ‘사물을 대하는 세계’든 다양 한 일을 겪다 보면 만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세상에는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걸 깨닫는 겁니다. 이 깨달음이 관용의 시작입니다. 관용을 가지려면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걸 받아들인 다음, 조금씩 상황을 바꿔가는 수밖에 없습 니다. 그러려면 나 자신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로써 우 리는 노력, 인내, 끈기를 배웁니다.
  • 자연과 어울려 지내기 위해서는 성실한 노력에 더해 예측 불가능한 것을 참아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모르는 것을 공백으로 둔 채 몇 퍼센트만 알아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우선 마주하는 그런 끈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옛사람은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야 했기에 이런 성격 이 저절로 갖춰졌습니다. 이렇게 보면 도시에 사는 현대인이 노력, 끈기, 인내를 싫어하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주변에 자연이 없으니 자연과 어울리는 데 필요한 성격 을 딱히 요구받지 않습니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눈치 가 있고, 말재주가 좋은 것,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는 이런 자질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매일 체감하겠죠.
  • ‘이렇게 하면 그렇게 된다’는 사고방식은 인공 세계, 즉 도시 세계에서만 통합니다. 자연은 그런 게 아닙니 다. 구조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 에서는 모든 일을 철저하게 인공화해서 진행하려 합니다. 뭐든 ‘이렇게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게 예정대로만 흘러갈 때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틀림없이 아이들이겠지요. 아이들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식도, 경험도, 돈도, 힘도, 체력도 없습니다. 아이들의 재산은 오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미래, 즉 막연한 미래입니다. 아이의 미래가 어떨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아이 들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미래라는 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걸 ‘무엇보다 소중한 미래’라고 부릅 미래를 확정할수록 아이들의 재산은 줄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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