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빌라 1층 할머니는 여든이 넘으신 경상도 분이시라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종종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도 나를 만나시면 무슨 말씀을 꼭 하신다. 나는 그냥 예에, 예에 라고 공손히 대답할 때가 많다.
어제는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와서는 자전거에서 내려서 클릿슈즈도 벗고 헬멧도 벗고 하는데, 그 찰나에 외출하시는 그 1층 할머니를 만났다. 그리고 마침 그날따라 할머니의 경상도 사투리 섞인 인사말이 또렷이 들렸다.
‘가는 걸음잉교? 오는 걸음잉교?’
‘예에 예에. 다 타고 들어오는 길입니다’
딱 한 줄 대화였지만 집으로 올라오는 내내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걸음, 오는 걸음.
우리 세대가 흔히 쓰는 말은 아니다. 우리 세대는 그냥 안녕하세요? 하고 만다. 정이 없다. 기껏해야 ‘식사 하셨습니까’ 정도인데.
1층 할머니가 내가 나가는지 들어오는지 궁금했을리는 별로 없다. 내가 들어오든 나가든 1층 할머니에게는 아무 상관 없으니까. 그냥 인사다.
가는 걸음잉교 라는 말도 왠지 어제따라 시적으로 느껴졌다. 가는 걸음. 오는 걸음.
잉교? 라는 의문사도 재밌었다. 경상도 스타일의 축약형은 한국어를 정말 창의적으로 구부려 짧게 만든다. 서울에서 나고자란 나같은 사람에게는 없는 재주다.
*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고 나서 부산에 와이프의 외할머니께 인사를 간 적이 있었는데 외할머니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김서방 와이리 애빗노?
‘ㅂ(ㅸ)’하고 ‘우’ 발음은 우리말이나 일본어 등에서 종종 혼용된다. 덥다 더워라 더버라, 반갑다 반가워 반가바 등이 그런 예이다.
애비다도 아마도 여위다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인 것 같다. 하지만 평소 언어에 아무리 관심이 많은 나라도 이런 말을 첨 듣고 유추하기는 어려웠다.
김서방 와이리 애빗노? 라는 세 어절은 참으로 간결하면서도 완벽한 의미전달이다. 조사하나 없이도 이리도 리드미컬한 한국어 구사가 가능하다니. 놀라버라.
우리말엔 나이드신 어른들이 쓰시는 단어가 더 시적이고 아름다운 말들이 많다. ‘표준어’라는 것 때문에 이제는 다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남은 말들도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 사라지겠지…
1920년대 글들을 보면 사투리도 소리나는대로 쓰는 경우가 많고 된소리도 발음나는대로 쓰는 경우가 많던데, 이런 글들이 훨씬 살아있다고 느낀다.
예전에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읽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익숙치 않은 충청도 사투리를 발음 나는대로 써내려간 책이었는데 읽으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었달까. 쉽지 않은 책이었지만 우리말에는 훨씬 살아 있는 느낌의 다양한 표현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
나는 가끔 공상을 한다. 내가 내 인생의 시계를 돌려 대학입시에서 학과를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그리고 수능성적이나 돈벌이 상관없이 개인 관심사로 학과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언어학과를 택할거다. 평생 좋아하는 책을 실컷 읽으며 박사도 따고 연구도 해서 세계적인 학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당당하게 표준어 따위는 없애자고 주장할거다.
맥주 안 마시는 날엔 이런 공상을 한다.
(2021년 8월에 페북에 쓴 글을 옮겼습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