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by 스티븐 핑커 (Steven Pinker), 2011년

이 책은 내가 평소에 가지고 살던 어떤 질문에 대한 궁금증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 질문은 바로 ‘인간의 폭력성은 시대가 지나면서 줄어드는가? 줄어든다면, 왜 줄어드는가?’ 라는 것이다. 특히 2019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채식을 시작하면서 이 질문을 품고 살게 되었는데, 우연히 ‘빈 서판 (The Blank Slate)’ 의 저자로 유명한 스티븐 핑커가 이 주제로 쓴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뭣 모르고 영어로 된 audible 오디오북을 다운받아서 운전할 때나 심심할 때 듣기 시작했는데 두 가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첫번째는 어려운 단어가 많다는 점이었고 (종이책은 사전을 찾으면 되지만 오디오북에서 이렇게 어려운 단어가 많이 나오면 당황스럽다) 두번째는 들어도 들어도 끝나지 않을 정도의 길이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아마존에서 원서의 길이를 찾아보고는 깜짝 놀랐고, 단어의 난이도가 높았기에 번역서를 찾아서 사기로 했다. 번역서도 1200 페이지. (‘주’ 만 200페이지 넘음)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인문/교양/과학 서적 중에서 가장 길이가 길지 않나 생각한다.

2021년 추석 연휴 동안에 나는 이 1200 페이지짜리 책을 꼼꼼히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1주일 정도 걸려서 천천히 읽었고, 오랫만에 허락된 오롯한 시간 덕분에 감명 깊거나 중요한 부분은 줄을 치면서 읽을 수 있었다. 몇몇 부분은 블로그 포스팅을 염두에 두고 사진을 찍었는데, 내용이 방대해서 나중에도 어느 부분이었는지 머릿속에서 짜맞추어야 했던 것 같다.

이 블로그 포스팅 또한 조금은 정성을 들여서 쓰려고 한다. 시간도 충분히 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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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그 길이 만큼이나 깊이 있는 논의를 제공하고 있다. 대략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이 있다.

– (정말로) 인간의 역사를 길게 보았을 때 폭력성은 감소하고 있는가?

– 인간은 왜, 어떤 경우에 폭력을 행사하는가?

– 인간은 왜, 어떤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서 폭력성이 감소했는가?

– 인간의 폭력성 감소에는 무엇이 가장 큰 공헌을 했는가?

– 과연 이 폭력성 감소는 계속될 것인가? 왜 그러한가?

이 책에서는 폭력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설명한다.

– 국가(혹은 부족)간의 전쟁

– 국가 내에서의 내전

– 테러

– 살인

– (인종 또는 부족을 상대로 한) 집단 살해 및 학살

– 종교적인 처형/ 마녀사냥

– 법적인 사형제도

– 노예제도

– 고문

– 연쇄살인

– 여성에 대한 폭력 (성적, 종교적, 혹은 그외의 무엇이든)

– 아동학대

–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학대

– 동물학대

이와 같이 엄청나게 넓은 폭의 논의를 담고 있다. 그리고 선사시대나 성서에 등장하는 고대 부족국가 이야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에서 구할 수 있는 여러 문헌과 통계를 동원해서 폭력의 감소는 인류 역사에서 일관되게 벌어지고 있는 현상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 포스팅에서는 통계 그래프 사진을 게재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책에는 엄청난 양들의 그래프가 나온다. (심지어 포아송 분포도 나온다!!)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에 앞서서 이 책에서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나오는 폭력의 동기를 들어서 왜 인간이 폭력을 행사하는지에 대해서 짚고 넘어간다. 이 내용은 이 책에서 반복되기 때문에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홉스는 경쟁, 불신, 영광이라는 세 가지 이유로 폭력이 행사된다고 했다. 첫번째 경쟁은 포식 또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함으로 해석이 되고, 불신은 상대방이 나에게 폭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경제학에서 말하는 ‘죄수의 딜레마 prisoner’s dillema’ 에 가까운 개념이다. 세번째는 영광인데, 이것은 바로 평판이다. 주변에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홉스에 따르면 경쟁, 불신, 명예 라는 세가지 이유로 폭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말이지 간결하고 인사이트 있는 설명이다.

나는 폭력이 감소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는 않았다. 하지만 작가는 이 부분을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 비교적 최근에 벌어진 세계대전, 테러, 그리고 뉴스 미디어에서 비중있게 다루는 연쇄살인이나 아동살인 등의 뉴스를 보고 있자면 우리 주변에서 폭력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인간의 역사를 아주 긴 관점에서 통계적으로 바라보면 분명하게 폭력의 규모는 감소하고 있다.

위에 캡쳐된 표는 작가가 과거의 대규모 전쟁에서의 대략적인 사상자 숫자를 20세기 중반의 인구수로 환산하여 전쟁의 규모를 재정렬해 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세계2차대전이라는 것도 사상자의 수가 아닌 사상자의 ‘규모’측면에서는 인류 역사상 9위로 떨어진다. 그 이전에 이미 그 보다도 더 큰 규모의 대량학살 혹은 전쟁은 인류 역사에서 흔하게 일어났고, 오히려 시간이 갈 수록 줄어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점은 평소 내가 갖고 있는 생각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고등학교 때 중국 청나라의 태평천국 운동이 2천만~4천만까지 사상자를 추정하는 어마어마한 학살의 사건이라는 점을 알고 놀랐다. 그리고 생각해보건대 제2차 세계대전이나 그 때 발생한 유대인 학살 등은 세계사가 서양 위주로 재편되면서 실제보다 부풀려져서 기술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세계 인구에서 중국/인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고, 이 두 나라에서 엄청난 대량 학살이 부지기수로 일어났음을 잘 아는데, 2차대전에 대해서 유독 강조해서 세계사를 배우는 것은 다분히 서양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나치에 의해서 벌어진 유대인 대량학살 genocide 역시 그렇다. 물론 인류 역사에서 엄청나게 불행한 사건이고 두번다시 일어나서는 안되겠으나, 서유럽 중심으로 쓰여진 세계사를 배우고, 서유럽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중요성이 실제보다 강조되고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들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 이전까지 세계사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이 타인종이나 다른 성별에 대해서 이뤄지거나, 침략후에 대량학살로 이뤄진 것인데 반해서 2차대전에서의 유대인 대량학살은 백인 대 백인으로 이루어졌고, 성별을 가리지 않고, 원래 한데 섞여 살던 주민들을 상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잔학성이 그 이전의 다른 사건들에 비해서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도 말하다시피 인류 역사에서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내용들도 나온다.

첫번째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낱개성 Thinginess 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다. 우리 민족은 이 두개의 전쟁을 하나로 인식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리나라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일제에 의해서 식민지가 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해방이 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이산적 discrete 하지 않고,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두번째는 한국전쟁이다. 사상자가 엄청나게 많이 발생하는 경우는 강대국간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미국, 중국, 소련(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과 같은 강대국들끼리 붙었을 때 전쟁이 겉잡을 수 없기 커지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가정에서 벌어지는 살인 또는 연쇄살인은 1명~10명 사이의 사망자가 발생한다면 강대국간의 전쟁은 최소 몇만에서 몇십만의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것.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국전쟁이 이들 강대국들이 붙었던 가장 최근의 마지막 전쟁이라는 점은 흥미로웠다. 그 이후로는 미-소 간의 냉전이나 미-중 간의 힘겨루기 등이 계속 있었지만, 적당한 선에서 서로 물러난 것이다.

위에 언급한 홉스의 이론을 국가로 적용해보면 대규모의 전쟁은 국가간의 경쟁, 불신, 명예 때문에 발생한다. 1-2차 세계대전은 식민지를 더 차지하려는 전쟁, 그리고 아마도 상대방이 먼저 공격할 것이 두려웠던 약간의 ‘불신’이 가미된 전쟁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경우에는 작은 불씨라도 엄청나게 큰 화재로 번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저자가 설명하는 여러가지 이유 (국가권력의 발달, 민주화,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의 증가, 이성주의의 발달, 온화한 상업의 증가 등등)로 우리는 이제 ‘긴 평화’를 누리고 있다. 특히 (정확한 통계를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2020년대의 대한민국 같은 국가에서는 아마도 폭력에 의해서 사망할 확률이 10만명 중에 5명 이하로 ‘극도로’ 낮을 것이다. 과거에 찾아본 바로는 한국은 자살하는 사람이 10만명당 25~30명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남이 나를 죽일 확률보다는 내가 스스로를 죽일 확률이 5-6배는 높은 나라인 셈이다.

그런데 (국가간의 전쟁을 제외한) 개인간의 폭력은 언제 격화될까? 위에 캡처한 두 부분은 사실 서로 다른 부분에서 발췌했지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 것 같다. 이 책을 보면서 정리가 된 나의 생각을 ‘폭력이 극대화 되는 세가지 경우’ 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본인이 도덕적이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경우이고,

두번째는 주변에 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경우이며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상대방과 장기적으로 이해가 얽힐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경우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것들이 맞아 떨어져서 말할 수 없이 많은 고통을 받았던 경험이 있는데, 긴 설명은 생략. 아무튼 본인보다는 타인을 위해서 싸운다는 마음, 그리고 그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그리고 어차피 싸움의 상대방을 두번다시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큰 싸움이 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는 나는 ‘정의’ 또는 ‘도덕’ 같은 말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런 개념들이 지극히 주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런 말들을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남을 대변해서 쓴다고 하는 자들을 극히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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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할 때, 나이가 마흔을 넘어가면서 느끼는 감정들이 있다. 그러니까 절반 정도의 인생을 산 셈인데, 지금 돌아보니 40년이라는 시간은 나 개인에게는 정말 눈 깜빡 할 사이에 흘러간 듯 하지만, 국가나 시대적으로는 긴 시간이었으며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꼰대라떼’를 그렇게 마시는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이쯤에서 꼰대라떼를 한잔 마시고 가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사무실은 물론이고, 가정내, 대중교통 등에서의 흡연이 만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택시기사, 버스 운전사 분들도 운전 중에도 흡연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가정과 학교에서 성인들이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체벌이 훨신 일상적이었던 것 같다. 나는 비교적 모범적인 학교 생활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나 또한 학교에서는 엄청 맞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냥 단순히 ‘맞았다’라고 표현하기에는 억울한 구석이 많은게, 대걸레나 빗자루 등으로 맞은 것은 예사였고, 몽둥이 찜질용으로 청테이프나 검은 테이프를 둘둘 감은 ‘사랑의 매’ 또는 30cm 자의 모서리 부분으로 손등을 맞은 기억 등이 생생하게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보급된 시점에서 바라보면 무슨 말도 안되는 일들이었겠냐고 하겠지만 불과 30년도 되지 않은 일이니 세상의 변화 속도는 정말 무섭다.

나는 내 바로 위 누나보다 8살이나 어린 막내로 태어나서 맞으면서 자라지 않는 행운을 누렸지만, 어머니께서는 늘 ‘너희 형,누나는 많이 맞으면서 컸다’라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지금은 예전만큼 가정에서의 ‘회초리질’이 만연한 것 같지는 않다. 가끔 터지는 영유아 학대 살해 사건 때문에 마음이 심란하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평균으로 보자면 70-80년대에 비해서 지금이 가정에서는 상대적으로 아이들에게 폭력을 덜 행사하는 것 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굳이 이런 꼰대라테를 마시는 이유는 그만큼 세상이 급격하게 변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거다. ‘노예제도를 폐지해야 할 것인가?’와 같은 말은 우리 세대에서는 지나간 담론이지만, 유럽과 미국에서 살던 20세대 정도 위의 인류 조상들이 들었을 때는 엄청 황당한 헛소리였다는 것이다. 실내에서 흡연을 해도 되는가? 라는 질문도 불과 몇십년 전에는 저런 당연한 질문은 입아프게 뭐하러 하나? 라고 생각한 사람이 대다수였고, ‘아이들은 때려서라도 제대로 키워야 한다’ 같은 말에 찬성하는 사람이 80% 이상이었던 세상이 불과 나의 형/누나 세대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채식을 해서 내 SNS 타임라인에는 ‘동물해방’ 같은 단어들이 많이 올라오고, ‘물고기’를 ‘물고기’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치게 인간의 포식 관점이므로 ‘물살이’ 라고 해야 한다는 담론들이 올라온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담론에 대한 생각은 ‘미친거아이가” 수준이지만, 또 누가 알겠는가? 불과 몇 세대 다음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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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쯤에서 왜 폭력은 감소하는가? 라는 이 책의 핵심 질문으로 돌아가볼까?

이 책에서는 민주주의와 인쇄기술(책) 등 미디어의 발달로 인한 감정이입 및 생명존중, 그리고 이성의 엘리베이션 (elevation) 현상 등을 들고 있다. 먼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가 단위의 폭력이 재현되기 힘들다는 점.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어떤 한 미치광이가 전쟁을 일으키기 어렵고, 사람들이 전쟁을 회피하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인쇄기술이나 미디어가 발달할 수록 사람들이 타인들의 고통이나 감정에 공감하게 되는데, 공감을 의미하는 empathy 같은 단어도 비교적 최근에서야 영어사전에 등재된 단어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로 인해서 다양한 분야에서 본인의 감정이나 고통을 투영(projection)하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는 아래 그래프에서 보여주는 권리혁명으로 이어진다.

이 중에세도 특히 기억에 남는 대목은 ‘이성의 엘리베이션 (elevation)’ – 즉, 사람들이 점점 똑똑해 지는 현상에 대한 내용이었다. 제임스 플린이라는 철학자는 1980년대 초에 IQ 검사에서 사람들이 점차 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현상을 플린 현상이라고 한다. IQ는 정의사 100이 정확하게 평균이고, 이보다 높은지 낮은지를 따진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IQ 검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때문에 IQ 검사를 하는 기관들이 점수를 보정 adjust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유전적인 이유, 그러니까 더 똑똑한 사람들이 태어나서는 아니고, 인지적 환경 때문임이 밝혀졌다. 그 중요한 이유는 학교 교육으로 보여지는데, 특히 과학적, 합리적, 이성적 사고를 하는 쪽으로 교육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비례, 퍼센트, 상관관계, 인과관계, 통제군, 플라시보, 대표표본, 인과오류, 순환논증, 비용편익분석, 매몰비용 등과 같은 개념들이 우리 이전 세대에서는 꽤나 낯선 개념들이었지만 학교교육과 최근에는 미디어의 발달로 사람들이 점차 이런 단어들을 범용적으로 쓰게 되고, 그 개념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질문: 식수가 부족한 마을이 있다. 그 마을이 수자원을 관리하고자 실시해서는 안되는 일은 다음 중 무엇인가?

A. 물사용을 늘린다.

B. 다른 마을에서 물을 사 온다

C. 가정마다 물 절약 기기를 설치한다.

D. 수도 요금을 더 높게 매긴다.

수요공급에 대해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D 가 답이면 안된다는 점을 잘 안다. 하지만 가격과 수요공급의 관련성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에 대해서 헷갈리기 쉽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질문을 MBA 수업에서 받은 적이 있는데, D 또한 그다지 도덕적인 답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해서 D를 실시해도 괜찮은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유독 영미권에서 교육받은 사람, 그 중에서도 비즈니스 스쿨을 나온 사람이 많다. 그들은 수요공급 법칙에 대해서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물이 부족한 마을에서 수도요금을 올리는 것은 인도주의적으로 옳지 않다. 가난한 삼이 더 물을 구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성적, 합리적 사고가 인간성을 해칠 수도 있는 단적인 예 중에서 하나로 거론되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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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감소에 있어서 그 대상이 누구냐에 상관없이 가장 큰 기여를 한 개념 중에 하나가 권리혁명일 것이다. 권리혁명은 처음에는 인종간의 벽을 넘어서 노예제를 없애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여성, 아동, 동성애자에게도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다른 인종이나 성별, 성적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것이 많아지고 이를 읽게 되는 경우가 늘어남에 따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고통에 공감을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 평소에 내가 몰랐던 하나의 개념이 나오는데 바로 오프라화(Oprahfication)이라는 것이었다. 피해자들이 개인적인 고통을 대중 앞에서 고백함으로써 일종의 치유를 얻는 것을 말한다고하는데, 이런 말을 시니컬한 톤으로 하기 보다는 피해자가 용기를 내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다.

아무튼 연이은 권리 혁명과 동시에 민주주의도 발달하고, 또한 이 책에서 ‘온화한 상업주의’라고 표현하는 상업의 발달로 인해서 상대방을 식민지 피지배인으로 두는 것 보다는 내가 생산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소비자층으로 두는 것이 더 이롭다는 계산도 한 몫했다는 것.

사실 이책을 읽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왜 인간의 공감은 동물권에까지 확장되었는가? 라는 개인적인 모티베이션이 있었기 때문인데, 동물권은 위에 언급한 노예제도, 동성애, 아동, 여성에 대한 폭력과는 3가지 측면에서 다르다.

1) 첫번째는 고통을 받는 대상인 동물이 자신의 고통이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는 점

2) 두번째는 동물권은 실제 이해당사자들이 권리를 진전시키지 않았다는 점

3) 세번째는 동물권의 신장이 나 자신에게 큰 이득이 되지 않는다점 점 (이 책에서는 포지티브섬 협상의 결과가 아니라고 표현함)

성경을 비롯해서 고대국가의 많은 문헌을 보아도 ‘동물은 하등하며, 인간을 위해서 창조된 존재’라는 인식은 인류 역사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으며, 어느 한두 문화권에서 생겨서 퍼진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존재하는 생각인 것 같다. 굳이 문헌을 따지지 않더라도 우리 DNA 만 분석을 해도 육식을 하는 것은 우리 인류에게 아주 오래된 습관인 것은 맞다.

그런데 서서히 인류의 폭력성이 감소하고, 공감능력과 이성이 발달하면서 인종 -> 여성 -> 아동 -> 성소수자 을 거쳐서 이제는 동물들이 느끼는 고통에까지도 사람들이 공감하고, 이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나 또한 건강상의 이유로 채식을 시작 했지만, 옛 말에 ‘행동이 바뀐 뒤에야 생각이 바뀐다’고, 채식을 한 다음부터 동물권에 대한 목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동물들이 죽는 것에 대해서 ‘공감’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실제로 많은 슬픔을 느끼고, 적어도 내 손으로 동물을 죽이는 일은 없기만을 바라면서 살고 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살던 어느 날, 어떤 지인이 살아서 풀을 뜯고 있는 소 (내가 운영하는 맥주공장이 있는 이천에는 우사가 많다) 를 보면서 ‘맛있겠다’ 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에 대해서 가벼운 혐오감을 느끼게 된 경험이 있었다. 정육이 되어서 빨간 고기가 된 채로 식당이나 정육점에 걸려 있는 ‘정육된 고기’ 형태라면 모르겠지만, 우리가 보고 있던 소는 누런 털가죽을 뒤집어 쓰고 사료를 먹고 있던 살아 있는 존재였는데, 어떻게 이런 소를 보면서 ‘맛있겠다’ 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나중에 좀 더 리서치를 하고, 책도 읽고, 명상도 하는 등 생각을 정리하고나서야 인간의 육식이 일반적인 육식동물의 육식과 차이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은 동물을 죽인 다음에 피를 빼고 정육을 해서 먹고, 냉장고나 냉동고에 두었다가 꺼내어 불로 잘 익혀서 어금니 치아가 잘 저작할 수 있는 연한 살로 만들어서 먹는다. 사냥하거나 도살한 고기를 가족이나 부락과 나누어 먹는 것은 당연하고, 문화가 발달할 수록 분업도 많이 이루어진다. 심지어 죽이는 것도 점차 본인의 손으로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죽는 동물에 대해서 기도를 올리거나, 감사한 마음을 갖는 등의 아주 기초적인 종교적인 관념도 존재한다.

반면, 대부분의 육식동물은 뾰족한 송곳니를 다른 피식자 동물의 살에 꽂아넣고 피를 빨아 먹으면서 고기도 뜯어먹는 방식이다. 고기를 저장하거나 익혀서 먹거나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모두 먹어치운다. 멀리 가지 못할 경우에는 고기 주변에서 계속 머물면서 포식을 하는데, 이때 피식자 동물이 계속 숨을 쉬는 경우도 꽤 있다. 종교적인 관념은 전혀 없다. 죄의식도 없다. 왜냐하면 이 폭력은 도구적 폭력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자는 그저 배가 고파서 식략을 포식하는 것 뿐이며, 여기에는 어떤 악의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나는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고, 인간의 육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나의 모습이 좀 신기하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나는 몇년 전까지는 고기라면 환장하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돼지고기는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소고기는 좋아했다. 전국 어디든 소고기가 맛있는 집이라면 차를 몰고 몇시간씩 가서 먹고 왔다. 불과 2-3년 정도의 채식이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타인에 대한 시선과 인식도 바꾼다는게 신기했다. 좀 더 긴 타임라인에서 인류를 볼 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이 책을 읽게 된 것이 모티베이션인 것이다.

다시 책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동물권이 처음 언급된 것은 1821년에 법으로 말에 대한 학대를 금지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말은 국가에서 군용으로 쓰는 경우가 많고, 지금으로 치면 탱크나 전차 같은 무기에 버금가는 자원이었을테니 어쩌면 말을 조심히 다루도록 한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의원들은 ‘이러다가 개와 고양이를 위한 법률까지 만들어지겠다’며 비웃었다고 하니, 인간의 역사는 조금 더 긴 관점에서 봐야 하는거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 이후에 원래는 계속 동물권이 발달할 수도 있었으나 1,2차 세계대전으로 식량궁핍에 시달린 인류와 공장식 사육으로 인한 고기값이 급락하면서, 그 길은 멀리 돌아서 70년대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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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이 책에서는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여러가지 인사이트 있는 고찰이 나온다. 인간은 언제 더 혹은 덜 폭력적이 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고, 그 어두운 면에 대해서도 파해친다. 이를테면 (앞서 홉스의 논리가 다시 반복되기는 하지만) 포식성, 우세경쟁, 복수, 가학성,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들이 연관되었을 경우에 폭력이 더 극대화되는데, 이에 대한 심리학적인 분석이 오롯이 한 챕터에 걸쳐서 나오는 대목은 이 책의 하이라이트 중에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역시 개인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폭력성이 덜해지는 경우는 내가 정의하는 ‘명성 reputation’ 의 세계에 사는 사람인것 같다. 그러니까 살인을 제외한다면 사람들은 ‘내가 여기서 한바탕 싸움질을 하고 다른데로 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따라서 좀 더/덜 폭력적이 되는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책의 여러 부분에 걸쳐서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자기통제가 강한 사람들과 폭력성에 대한 고찰도 나온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기통제가 강한 편이라는 주변의 평가를 많이 들었던 편이다. 좀 더 쉬운 말로 옮기자면 ‘너는 참 자기관리를 잘 하는 것 같아’ 와 비슷한 투의 말을 많이 듣는 편이다. 아마도 학창시절에 학업성적도 괜찮았고, 평소에 독서나 운동도 많이 하는 편이다보니 듣게 되는 당연한 평가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나의 겉모습 때문에 인간미가 없다거나, 남들에 대한 공감이 떨어진다거나, 딱딱해보인다거나, 냉정해 보인다는 등의 평가를 받은 적도 많았다. 나는 속으로는 억울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또래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은 양의 소설이나 영화를 봤다. 그럴때면 일인칭 화자에게 쉽게 동화되고는 했다.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고 스스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평가를 받으면 억울한 느낌을 많이 가지게 됐다. 딱히 나에 대해서 ‘폭력적’ 이라는 평가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스스로 다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는 공감능력이나 성소수자 권리, 여성권, 아동권,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남들보다 센시티브 한 편이었기 때문에, 인지부조화의 상태를 겪은 듯 하다. 이 역시도 이 책의 여러 부분에서, 자기통제가 강한 사람은 공감능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assumption은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일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해 주고 있었다. (핑커 형님 감사!)

나는 2월생이다. 그래서 남들보다 학교를 일찍 들어갔다. 초등학교 남학생의 생활은 꽤나 physical 한데, 나는 이런 초등학교 생활이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나중에서야 왜 내가 육체적으로 힘들었는지 알게 되는데, 때로 10개월 이상 먼저 태어난 아이들과 부딪힐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직 발달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초등학교라는 집단에서 10개월은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 수 있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동창들이 기억하는 나는 ‘무 nothing’에 가깝다. 내가 같은 반에 있었는지 인식을 못하는 동창들도 많다. 나는 학교에서 수업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그냥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았고, 딱히 여기저기서 맞고 다닌 것은 아니지만, 종종 다른 친구들이 폭력적이라고 느낀 기억이 많다. 체육시간은 물론이고, 종종 싸움이 났을 때를 생각해보면 공포스러웠던 기억들도 종종 있다. 나는 작고 약했다.

중학교 2학년때 즈음이 되어서야 키가 훌쩍 커지면서 육체적인 두려움에서 조금 벗어났다. 역시 철 없는 남자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육체적인 사이즈가 중요했다. 그리고 중학교때 유도부에 들어가면서야 제대로 폭력,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남들한테 맞고 다닐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사라진 것 같다. 아무리 스티븐 핑커가 긴 평화와 함께 인류의 폭력성이 급속도로 감소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폭력은 나의 삶의 바로 가까이 있었다. 다행히 남들보다 이성과 지능이 인정받는 환경에서 지내온 덕분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제일 운이 좋았던 것은 군대조차도 폭력이 제로에 가까운 곳들에 있었다는 점이다.

성인이 된 다음에는 폭력은 더이상 없지만, 폭력이 소송과 비판으로 바뀌었다고 느낄 때는 종종 있다. 고대국가였다면 부족간에 싸움으로 번졌거나, 중세시대 같으면 결투를 신청했을 법한 일들이 이제는 더이상 폭력적인 방법이 아닌, 송장과 댓글로 이루어지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이 또한 폭력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상당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용증명과 송장을 몇번 받아본 사람이라면 아무리 내가 떳떳하고 당당하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댓글은 또 어떤가? 분명 잘못한 것이 없지만 비난받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분명 폭력은 다른 형태로 진화하고 있기는 하다.

*

이 책을 다 읽고 덮으면서 큰 숙제를 끝낸 기분과, 막혀있던 궁금증 몇가지가 풀린 기분,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지식들의 조각들이 맞춰진 기분이 들었다. 총.균.쇠.의 제레드 다이아몬드,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 The Debt의 데이빗 그레이버, 심지어는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들이 인류 역사를 한, 두 세기 단위가 아니라 수천년, 수만년 단위로 줌아웃 zoom out 해서 보여주면서, ‘자, 우리는 이쪽으로 가고 있다구!’ 라고 이야기 해줄 때 나는 깨달음과 안도감을 느낀다.

***

며칠 후에 덧붙임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TED 에 스티븐 핑커의 동영상이 있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것은 (thanks to Youtube algorithm) 유발하라리와 스티븐 핑커의 대담도 있는 것.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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