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맥주에 빠져들게 되었는가? – 1. 홀푸드 매대에서 낯선 맥주들을 발견하다

 

2010년 미국의 시카고 인근의 작은 마을로 MBA 유학을 가게 되었다. 5년간의 직장생활을 끝마치고, 퇴직금과 우여곡절 끝에 마련한 5천만원을 손에 들고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내렸다.

 

미국에 오면서 내가 다짐했던 것은 크게 3가지 정도였다. MBA라는 큰 투자를 하는 만큼, 학교를 졸업하면서 좋은 직장을 얻고 싶었고, 직장을 다니는 동안 하지 못했던 운동과 여행을 즐기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즐기고 싶었던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와인이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종종 밤에 와인바에 가서 멋진 와인을 앞에 두고 그 와인에 숨겨진 이야기를 읊어대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도 와인에 대해서 박식해지고 싶었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와인을 안다는 것은 왠지 세련되어 보였고, 맛을 아는 사람처럼 보였고, 부드럽고 고상하며 지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허영이라고 놀려대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지만, 내 눈에는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미국에는 어느 동네에 살건간에 아주 외딴 동네가 아니라면 좋은 리쿼 스토어 (liquor store)들이 있거나, 와인 전문샵들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 꼭 와인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집 근처에 있는 코스트코나 홀푸드 정도만 가도 좋은 와인을 20-30달러 정도에 얼마든지 살 수가 있었다. 한국에서 와인바에 가서 마시려면 10만원 이상을 줘야만 마실 수 있었던 와인들을 한국돈 2-3만원대에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왠지 큰 특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살게 된 에반스톤(Evasnton)이라는 도시 또한 미국의 3대 도시 중에 하나인 시카고에서 차로 불과 20-30분 정도 떨어진 곳으로 좋은 레스토랑도 많고, 식료품점도 많아서 와인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대학타운에서 술을 함께 마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당시의 나는 마음 맞는 사람들 몇 명만 뭉쳐서 조금씩만 돈을 보태면 좋은 와인을 얼마든지 마실 수 있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학교가 시작되고 한국 친구들도 사귀게 되고, 외국 친구들도 사귀게 되면서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기회들은 계속 늘어났고, 나도 와인에 대해서는 조금씩 지식과 경험치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가끔 집 앞에 있는 홀푸드 수퍼마켓에서 와인을 몇병 사다가 집에 두고 심심할 때면 혼자서도 홀짝거리면서 마시게 되었다.

[에반스톤에서 유학하던 당시 집 앞에 있던 홀푸드의 맥주 매대, 나는 이곳에 있는 맥주들을 하나씩 맛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와인의 한가지 불편한 점이 있다. 주당들이야 상관이 없겠지만, 나는 술을 좋아하긴 하는데, 많이 마시지는 못하는 체질이다. 와인 반병이면 그 다음날 상당히 힘들 정도로 취할 정도이다. 그러니 한병을 모두 마시기는 쉽지 않다. 물론 스탑퍼(stopper)로 병의 입구를 막아놓고 며칠에 걸쳐서 마시면 되긴 하지만, 와인의 맛이 변하기도 쉽고, 한 와인을 2-3일씩 마시다보면 좀 지루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집 앞에 있는 홀푸드를 뒤지다가 우연히 맥주 코너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평소에 듣도 보도 못한 맥주들이 즐비했다. 물론 처음에는 이 맥주들을 사지 않았다. 한국에는 들어오지 않은 홀푸드라는 미국의 유기농 전문 수퍼마켓은 지역의 특산물이나, 미국내에서도 일부 계층만 먹을 것 같은 음식들을 가끔 판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품질은 좋지만 맛이 없는 제품을 살 확률이 꽤 높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물건을 살 때에는 조심스럽게 사야 하기도 한다. 그런데 같은 학교로 유학을 와서 친하게 지내던 한 형이 홀푸드에서 이런 저런 맥주를 사봤다면서 함께 기숙사 로비에서 마시자고 했다. 기숙사 로비에서 한바탕 한국 사람들간이 맥주 파티가 벌어졌다. 간단한 칩들을 사서 봉지채로 뜯어놓고서는 그 형이 사온 맥주들을 마셔보기 시작했다.

 

 

처음 맛보았던 맥주는 Founders 라는 브랜드의 Double Trouble 이라는 맥주와 Dogfish Head의 60minute IPA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에는 맥주의 맛이 생각보다 너무 강하고, 향도 있어서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자꾸 마시다보니 적응이 됐다. 아니 적응이 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입에 짝짝 붙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와인보다는 도수가 낮으면서도 평소에 한국에서 마시던 밍밍한 맥주보다는 적당히 강도가 느껴졌다. 게다가 과실주를 마시면 달콤한 느낌 때문에 쉽게 취하는 듯한 느낌이 들던 나였는데, 맥주는 곡주의 쌉쌀한 맛이 느껴지면서 조금 덜 급하게 취하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한 병이 330ml정도라는 점도 좋았다. 와인처럼 750ml한 병을 모두 끝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었다. 이정도라면 집에서 혼자 TV를 보면서, 혹은 인터넷을 하면서 홀짝거리면서 마셔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맥주는 가격이 와인보다 저렴하다. 아무리 좋은 맥주라고 하더라도 좀처럼 한 병에 20달러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다. 저렴한 와인이 20달러 정도부터 시작하는 것을 생각하면 완전히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보통 홀푸드나 타겟 같은 미국의 식료품점에서 파는 좋은 맥주는 약 9달러였고, 그것도 무려 4병의 가격이었다. 와인이 무언가 불편한 정장의 느낌이라면, 맥주는 편안한 청바지의 느낌인 것이다.

 

게다가 나중에야 발견한 한가지 맥주의 또 다른 좋은 점은, 맥주의 종류가 와인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와인보다도 더 많다는 점이었다. 매일 매일 다른 맥주를 마셔도 질리지 않을 만큼 세상에는 수많은 맥주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홀푸드에 가면 와인 매대보다는 맥주 매대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맥주를 이것저것 사서 집에 가져와서는 숙제를 하거나, TV를 볼 때 조금씩 홀짝이면서 마시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4팩이나 6팩을 사는 경우는 이웃에 사는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마시기도 했고 사람들과도 맥주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늘어났다. 누가 어디서 희귀하고 좋은 맥주를 사왔다고 하면, 그 집에 가서 마셔보는 것도 좋은 ‘껀수’가 되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사실 와인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과도 공유하는 것으로서, 즉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만의 취미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하지만 맥주를 마실 때에는 와인을 마실 때와는 다른 무언가 알 수 없는 소박함이 있다. 꼭 차려입고 만나지 않아도 되는 동네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한참 나중에서야 맥주에 빠져들게 된 이른바 ‘맥덕’ 들과 교류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맥덕들 중에는 나처럼 처음에는 와인으로 입문했다가 나중에 맥주로 접어들게 된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그들이 맥주를 와인보다 더 좋아하게 된 이유들은 내가 꼽은 이유들과 비슷했다. 그것은 바로 ‘편안함’ 이라는 점과 ‘소박함’이라는 점으로 표현되는 느낌들이었다. 굳이 앞에 놓여 있는 와인의 이름과 품종과 라벨에 대해서 미주알 고주알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이 즐거운, 그런 느낌.

 

아무튼 나는 이렇게 와인을 마시는 횟수보다는 맥주를 마시는 횟수가 훨씬 더 늘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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